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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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승 (金熙昇) 이야기

김희승 (金熙昇) 이야기 - 북지방면군 제 26 야전근무대 동원

김희승
  • 1924년

    춘천군 신동면에서 출생

  • 1945년 1월 15일

    용산 30부대 입대 북지방면군 직할 제 26야전근무대 편입

  • 1945년 8월

    중국 장개석 군대에 의해 무장해제, 개봉 포로수용소 수용

  • 1946년 5월

    상해를 거쳐 부산항으로 귀국

동원 그 당시 군인으로 가실 때, 연세가 어느 정도 되셨죠?

그때 스물한 살. 45년도 1월 달, 양력으로 1월 14일. 춘천서 떠났어요.

할아버지께서 징병1기생인가요?

그게 그럴 거야 이게. 근데 1긴대도 글쎄 이제 우리가 시방 그 전에도 그런 게 있었어요. 뭐 장남이다 인제 이런 사람은 뭔가 나중에 가고 그랬거덩. 안보내고 인제. 그래 나같으믄 가족을 부양할 사람인 데두, 또 그 다음에 신체검사가 고전에 갑종(甲種)도 아니고, 제2을종(第2乙種)이 됐어요. 그런데도 결국 끌려갔던 거지. 갑종 합격도 아니고 헌데.

영장을 그면 그 전에 받으셨겠네요?

그럼요. 이게 영장 거 집으로 왔지. 시뻘건 종이로.

군대를 가기 전에 국민학교나 이런데 모여서 연성 훈련 같은 걸 받지 않으셨어요?

이제 연성 훈련 받는 거는 그건 저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덜. 그런 사람들 이제 연성소라고 해서 인제 그 따로교육을 시켰는데요, 우리는 인제 그건 안 받았지. 근데 왜 안 받았느냐. 우리 같으면 인제 고등학교에서 군사훈련을 가리켰거든. 고등학교에서. 일본인들이 그 저, 우리나라도 그랬었잖어. 뭐 배속장교 뭔가 하나 두고, 군사훈련을 시키고 그랬거든.

가서 무슨 일을 하게 되고, 언제 까지 일 하게 되고 그런 것 얘기 들어보셨어요?

아이 전혀, 전혀. 그때 여기까지 간다는 것만 알지 뭐. 그 당시에는 일본사람들이 이 저 태평양전쟁, 이제 그 우리네가 이야기하는거 얘기지. 일본 아이들이 얘기 헐 땐 대동아전쟁이라고 그랬어요. 얼루 가는지는 전혀, 전혀 뭐 알지, 여기 들어가서 열흘 동안 있었는데, 거기에 들어가서두 여기서 떠날 때까지 전혀 얼루 가는지도 몰랐어. 다만 저 알게 된 거는 용산역에서 떠났는데, 아 북쪽으로 가는구나. 그래서 인제 만주나 중국으로 갈 것이다 하는 걸 짐작을 했지. 거 그기도 어디루 간다는 거는 전혀 몰랐죠.

또 중국으로 가시게 된 거예요?

글쎄 중국으론 어떻게 간 게 아니라, 끌려서 글루 간 거지 뭐. 화차를 타고. 그리곤 가는게 이제 북쪽으로 가다가 이제 만주나 중국쪽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짐작을 하고 인제 가서 내린 온 곳이 신향(新鄕)이래는 곳이예요.

무슨 교육을 또 거기서 받으신 거예요?

거기 군대 그대로예요. 군대. 사격술이라든지 무슨 뭐 군인들 기초 훈련.

생활하실 동안 먹는 거나 잠자리며 이런 거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건 뭐 군대생활이래는게 그게 뭐 편하진 않지.

월급은 어느 정도 받으셨어요?

월급은 얼마를 탔었느냐, 일분에 일전을 얘기해요. 일각은 인제 십전을 얘기하고. 5각은 50전. 이거는 인제 중국 사람덜, 부자들이 은행을 만들어 가지고, 이 화폐를 발행하고 그랬드랬어요. 우리가 증권, 주식같이 올랐다 내렸다 하지 않소? 그래서 인제 이거 500원이라고 하지만은 이게 뭐 한 백원 가치루밖에 안 통해. 물건 살 때 우리 돈으로 살려면 100원으로 샀는데, 뭔가 이 돈으로 산대면, 뭔가 500원으로 줘야 돼. 이런 식이지.

그 대략 그 월급을 어느 정도 받으셨어요?

아이 뭐, 안돼요. 27원, 27원.

개봉 아리랑부대 주소록

개봉 포로수용소에서 김희승이 작성한 한국인 포로들의 주소록
<개봉 아리랑부대 주소록>

요 정도 받으면 이게 그렇게 큰 돈은 아니잖아요?

큰 돈 아니지. 인제 매달 오원씩 집으로 보낸다고 해서 뺐는데, 집으로 하나도 안 갔어. 지들이 떼 먹었는지 하여튼 안 왔어. 그래가지고 인제 저금을 이렇게 했는데, 그러니까 도대체 뭐 못 찾아요. 시방 여기 인제 증명서 그 있지. 이런거 또 어떻게 할런지 모르지.

해방된 건, 어떻게 아셨구요?

중국 사람들한테 무장해젤 당했어요. 그래가지구 인제 중국사람의 이제 포로가 됐던 거지. 그른까 인제 떼놈들 심부름 해주고 뭐 먹구, 그 물도 데워주고 뭐, 나무도 패주고 뭐, 응, 빨래도 해주고. 거선, 우리가 제일 애 먹은 게, 먹는 게 제일 애먹었어요. 먹을 게 없어가지구. 매수수, 매좁쌀, 이런거 가지구 죽빽에 못 먹는거야. 밥도 못 해먹구. 워낙 모잘르니깐 그냥 거 그냥 저 소금타서 죽 끓이구, 그래 변비가 생겨요. 우리들 참 애들먹었어. 그럼 어딜 가는줄 알아? 이 저 붓, 왜 이렇게 저 참대로 이렇게 왜 가는다런거 왜 저 볼펜으루 이렇게 된거 있잖아. 이 그 간장물을. 간장물을 입에다 흠꼬, 그 뭔가 빨대를 입에다 물고 상대방 변비 생긴 사람 똥구먹에다가 걸 넣고 불어서, 그 간장물을 느서 대변을 보도록, 그렇게 하면 변을 볼 수 있게끔, 그래그렇게나오지. 그러니까그 숱하게 그냥 모두, 아휴 그 때가 제일 아주 고통스러와.

그렇게 하면 변을 볼 수 있게끔.

그래 그렇게 나오지. 그러니까 그 숱하게 그냥 모두, 아휴 그 때가 제일 아주 고통스러워. 이 중국 장개석 군대들은 일본 군인들이 갖고 있던 식량들을 자기네는 그거 먹고, 우리는 그 뭐 매수수, 뭐 매좁쌀 뭐 이런거 갖다서 그냥 죽 끓여서 먹어. 많이나 주나? 몇 일만 있다 또 대변들 못 봐가지고 변비증이 걸려가지구.

개봉에서 계시다가 귀국하시게 된 과정을 좀 말씀해주세요.

개봉에서 이렇게 서주 거쳐서 상해에. 인제 여기 46년 5월 9일 날 타갖고, 11일 날.

그 당시에 부산에 도착을 해보시니까 어떻든가요?

그러니까 이제 배에서 인제 내려야, 인제 배가 도착을 했는데, 우리 그 배에 탔던 사람 중에 호열자 걸린 사람이 스물 일곱인가 있었어요. 그럼 이 사람들 있으면 우리 못 내린다. 검역·검사에 불합격이 된다 이래가지구, 호열자에 걸린 사람, 이 사람들을 이 저 그걸 모라 그러냐믄, 쇠사슬로 이런거 하여튼간 배에 쓰는 쇠사슬, 이렇게 엮은 것들 해서 그냥 배에다 던져뻐렸어. 뜨이지 안토록.

그 사람들 때문에 그 수백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사람 때문에 못 들어오니까.

그럼. 그 사람 때문에 못하게 되니까. 다 검역검사에 불합격되면. 그거 글쎄 상해에서 방역검사를 하고 태웠는데도, 고 사이에 그래 돼. 하루 밤 사이에.

그래가지고 이제 부산에 들어오셔갔고는 ,

그 저 아픈데 빈대가 많이 있어. 아이고 말할 수 없었죠. 빈대때문에. 와가지고 또 뭐 여기서 인제 뭐야 검역, 인제 또, 그게 뭐 이 저 그걸 뭐라 그러더라. 디디딘가? 그거 허연 저 밀가루 같은 거 해가지고. 이제 그거 끝난 사람한테는, 뭘 줬느냐면은 끝난 사람한테만 줬는데, 방역끝난 다음에 이거 인제 돈 천원 준거야. 그 때에 부산에서, 부산항에서. 천원씩.

천원이면, 쫌 큰 돈 아닌가요?

큰돈이지 시방 어마어마한 돈이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까 우리 저 인저, 그랬지? 천원이 얼마야 그거. 야 이거 팔자 고쳤다 이렇게 생각헌거지. 근데 글쎄 써 보니까 응 이발허는데 170원, 막걸리 한대 80원, 양말 하나에 170원.

그 옛날 그 물가가 아니었네요.

그니깐 천만에 그냥 뭐, 전혀.

『갑자을축생은 군인에 가야 한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회생자 등 지원위원회 발간) p224~p244. 요약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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