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대 (申鉉大) 이야기
신현대 (申鉉大) 이야기 - 하루토리 탄광 노무
- 1924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출생
- 1942년 7월
다이헤이요(太平洋) 탄광 하루토리(春採) 탄광으로 동원
- 1944년 8월
후쿠오카현(福岡縣) 소재 미쓰이(三井)광산 미이케(三池) 탄광으로‘전환배치’
-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하여 고향으로 귀환
나는 1924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1942년의 7월의 어느 날, 일본인이 강원도 인제군의 탄광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러 왔습니다. 그때 나는 인제군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이북 장전에 있는 금강중학교 2학년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집이 어려워서 신문 배달 등을 하며 학비를 벌고 있었는데, 내 힘으로 학비를 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이렇게 고생하느니 일본이나 가보자’는 생각에 모집에 응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나이가 매우 어렸지만, 일본 사람들도 일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를 데려갔습니다.
인제군에서 70명 정도의 사람이 모여서 홋카이도로 출발하여, 보름 만에 홋카이도의 구시로항(釧路港)에 도착하였습니다. 기차에서 내려 처음 본 구시로항은 너무 낯선 곳이었습니다. 갑자기 ‘내가 여기에 왜 왔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함께 동원된 동료들도 나의 우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겠지요. 내가 일하게 된 탄광은 '하루토리 탄광'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다꼬부대'와의 싸움
신현대가 하루토리(春採)탄광으로 동원된 후, ‘하루토리 사진관’에서 촬영하였다는 사진이다. 사진의 뒷면에는 직접 자필로 하루토리탄광의 주소를 기재해 놓았다.
한국 사람들은 ‘협화료(協和寮)’라는 함바에서 생활하게 되어있었는데, 하루토리탄광에는 3개의 협화료가 있었습니다. ‘함바’주인은 한국 사람이었고, 감독은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탄광에는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등 각처에서 온 한국 사람들이 몇 백명 이상 있었어요.
하루토리탄광에 처음 도착한 날,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탄광에는 ‘다꼬부대’ 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대우가 아주 심했습니다.
‘다꼬’는 일본말로 문어라는 뜻인데, 사람을 뼈가 없어질 정도로 두드려패서 일을 시킨다는 의미에서 ‘다꼬부대’라고 부른 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우리 함바의 한국 사람들이 “같은 한국 사람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고 하면서 ‘다꼬부대’를 부수러 가자고 한 것입니다. 우리 강원도 일행에게는 “당신들은 오늘 처음 왔으니까 같이 가자는 말은 하지 않겠으니 구경이나 하라”고 하였습니다.
'다꼬부대’ 숙소는 우리 숙소와 멀리 떨어진 산 밑에 있었습니다. 그곳을 부수러 간 사람들은 전기를 끊어버리고 들이닥쳐 ‘다꼬부대’ 노동자들에게 여기 있다가는 다 죽으니 도망치라고 하더군요. 도망친 사람들은 도망쳤지만,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강원도 일행은 너무 겁이 나서 금방 숙소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습니다. 곧 구시로 시내에서 싸이렌 소리가 났습니다. 이윽고 권총을 들고 칼을 찬 헌병대가 들이닥쳐 조사를 한다며 우리가 자는 곳에 들어와서 이불을 뒤집어 보았습니다. 우리 ‘함바’ 주인이 “이 사람들은 오늘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 곳에 가지 않았다”고 하자, 그제서야 돌아갔습니다. 몇몇 주동자들이 잡혀서 형무소에 들어갔고, 형을 마친 후 탄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추운 형무소에서 생활하며 손톱과 발톱이 모두 빠지고 몸이 약해져서 일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합니다.
나에게 처음 주어진 탄광일은 탄을 골라내는 ‘선탄(選炭)’ 작업이었습니다. 내 나이가 어리니까, 석탄을 캐거나 하는 힘든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선탄장은 일본인 여자들만 일하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남자는 나뿐이었어요. 그리고 선탄일은 채탄보다 보수가 적어서 밥값을 지불 할 정도 밖에 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년 후에는 굴 안에서 일하겠다고 말했고, 굴 안에서 기계를 조작하거나 탄을 캐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탄작업보다는 돈을 많이 받았지만, 돈이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식사량이 적어서 따로 밥을 사먹기도 하고, 일할 때 입는 옷이 너무 형편없어서 옷도 사 입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다치다
하루토리탄광에서 일하던 중,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기계를 조작하고 있던 어느 날, 천장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천장이 무너질 때 재빠르게 몸을 피해 다리만 깔리게 되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내 몸 전체가 깔려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리 치료를 위해 하루토리병원에 3개월 동안 입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구부리고 펴는 것도 하지 못하였는데, 치료를 받은 후에 겨우 구부리고 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완치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도 오른쪽 다리가 불편해요. 퇴원 후에도 1년 동안 목발을 짚고 병원을 다녔습니다. 병원에 다니면서도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일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그때는 전쟁을 하고 있어서 일본 사람들이 죽느냐 사느냐 할 때이기 때문에 아프다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토리탄광에서 2년 정도 일하고 나니, 하루토리탄광의 탄이 고갈되었다고 하며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구주(九州:규슈)에 있는 탄광으로 보냈습니다. ‘탄이 고갈되었다’는 말은 소문으로 들었는데, 구주로 옮기는 확실한 이유는 회사 기밀이니까 말해주지 않았어요. 하루토리탄광은 아주 문을 닫은 것은 아니지만, 나이 많은 일본인 몇 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내가 일하게 된 또 다른 탄광은 후쿠오카현(福岡縣) 오무타시(大牟田市)에 있는 ‘요쓰야마코(四山坑)’라는 이름의 탄광이었습니다. 이곳의 탄광은 하루토리탄광보다 일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홋카이도는 원래 추운 곳이기 때문에 하루토리 탄광에서는 긴팔과 긴바지를 입고 일했었거든요. 그런데 구주의 탄광은 지열이 너무 뜨거워서 옷을 입지도 못하고 속옷만 입고 일해야 했습니다. 또, 구주는 전쟁 때문에 공습도 심하고 식사량도 너무 적어서 힘들었습니다.
어느날,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소문과 함께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도 모두 건강히 잘 있었습니다. 당시의 힘들었던 경험은, 젊은 사람들에게 자세히 이야기 해주어도 아마 다 이해하지는 못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