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식 (全愚植) 이야기
전우식 (全愚植) 이야기 - 아사지노 비행장 노무
- 1926년
전북 금산군(現 충남 금산)에서 출생
- 1942년
부친 전해평 홋카이도(北海道) 소재 아사지노(淺茅野)비행장으로 동원
- 1943년
일본 규슈(九州) 소재 탄광으로 동원
탈주 후 오사카(大阪) 소재 작은아버지의 집에서 생활하다가 기관차 제조공장으로 동원 - 1943년 12월
부친 전해평의 사망소식을 듣고 직접 아사지노(淺茅野)비행장을 찾아가 부친의 유골을 수령
- 1946년 10월
고향으로 귀환
나의 아버지 전해평은 당시 고향인 충남 금산(당시 행정구역은 전북 금산)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면 사무소 직원들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동원 되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17세 되던 해 봄이었고 해방되기 3년전 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끌려간 곳은 일본에서도 아주 추운 곳, 북해도 아사지노(淺茅野)비행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과로와 혹한(酷寒)으로 고생하다가, 기관지염과 대장염에 걸려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아사지노’라는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냐고요? 그건 제가 직접 그 곳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아버지와 편지 왕래도 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동원된 후 나도 규슈(九州)에 있는 탄광으로 ‘모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규슈의 탄광에서 일하던 중, 오사카(大阪)로 도망쳤습니다. 오사카에는 작은 아버지가 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작은아버지 집으로 징용장이 날아왔습니다. 당시에는 모두 배급제였으므로 쌀 표를 받기 위해 소재지 경찰서에 등록을 해놓았는데, 그것 때문에 걸렸는지 제 앞으로 징용장이 나오더라고요. 당시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100명과 함께 동원되었습니다. 내가 징용되어 일하게 된 회사는 오사카 미나토쿠(港區) 가와구치(川口) 전철역 앞에 위치해 있는 기관차 만드는 회사였고, 작은아버지 댁에서 전철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기관차 부품에 구멍을 뚫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다
홋카이도 에사시군(枝幸郡) 하마톤베쓰(浜頓別) 히로야마(弘山) 병원에서 발급한 사망 진단서이다. 이 진단서에서 전해평이 1943년 12월 25일 기관지염 및 대장염으로 사망하였음이 확인된다. 전해평은 아사지노(淺茅野)비행장에서 ‘토공부(土工夫)’로 일하던 중 사망하였다.
전우식은 오사카의 기관차 제조공장으로 동원되어 처음 몇 주간 작업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진은 훈련을 받을 당시 훈련복을 입고 촬영한 사진.
오사카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중, 북해도로 동원된 아버지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작은아버지가 아버지의 유골을 찾으러 가자고 내가 일하고 있는 공장으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 내 나이는 18세 였습니다. 노무계의 허락을 받고 작은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유골을 찾으러 먼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사카에서 북해도 하마톤베쓰(浜頓別)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었습니다. 삿포로에서 기타미선(北見線)을 갈아타고 갔어요. 비행장이 있는 곳이 아사지노(淺茅野)라고 해서 하마톤 베쓰에서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습니다. 거기서 여관을 잡고 구미(組), 구미 이름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아무튼 구미한테 연락을 하니까 그 다음날 구미직원이 여관으로 왔지요.
아사지노에 도착한 날은 1월 1일이었습니다. 구미(組) 직원이 그날은 설날이니까 하루 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1월 2일에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하러 갔습니다. 직원과 함께 기차를 타고 아사지노에서 한 정거장 아래에 있는 하마톤베쓰로 갔습니다. 마침 ‘하마톤베쓰 병원’이라는 곳에 고향 사람이 입원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 병원은 시골에 있는 조그만 개인 병원이었습니다. 그 고향 사람은 우리 아버지와 함께 ‘다코베야’에서 일하였다고 구미(組)직원이 말하더군요.
화장터는 하마톤베쓰 마을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눈이 하도 많이 오고 차도 다니지 않아서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갔습니다. 그 때 눈이 1m 이상 쌓여 있었어요. 화장(火葬)을 집행하는 사람과 시내에서 만났는데, 그 사람이 장작, 석유 등 화장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더라고요. 화장터가 있는 곳은 산골짜기 같기도 하고 벌판 같기도 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그 주변을 잘 살필 수 없었습니다. 시체 하나가 들어갈 만큼 빨간 벽돌이 사각형으로 쌓여 있었고, 그 안에서 화장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화장터에 도착했을 때, 내 아버지의 시신은 눈 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유족이 오기 전까지 시신이 부패하지 않게 그렇게 방치해 놓은 것 같더군요. 북해도의 차가운 눈 속에서 그렇게 누워 나를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를 보니 정말 가슴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습니다. 가지고 온 장작에 석유를 붓고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했습니다. 화장(火葬)을 하면 유골이 너무 뜨거워서 바로 꺼내지를 못합니다. 하루 정도 식히고 나서, 1월 3일에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여 모셔왔습니다. 직원이 나중에 장례비를 보내준다고 했는데, 받은 기억은 없습니다.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나는 다시 오사카로 돌아와서 ‘징용공(徵用工)’으로 일하였습니다. 공장에서 기관차 부품에 구멍뚫는 일을 하다가 기계에 손가락이 딸려 들어가서 손가락 두개가 절단되었습니다. 2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리다고 하면 어린나이에, 나는 징용으로 내 청춘을 잃었고, 일본에서 아버지를 잃었으며 내 손가락 두개를 잃었습니다.
전시기 노무 동원
전시기 노무동원은 주로 20세에서 40세의 신체 건강한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실제로는 10대의 어린 소년이나 40대 이상 되는 중년층도 동원되었다. 모집 당시에 각 면이나 동네에 떨어진 할당수를 채우기 위해 나이를 속여서 송출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각 가정에 따라서 아들 대신 아버지가 동원되거나 반대로 연로하신 아버지 대신 어린 아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 집에서 형제가 둘 이상 동원되는 경우도 많았다. 아사지노 비행장에서 사망한 전해평과 그의 아들 전우식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 동원된 경우이다. 아버지인 전해평은 1943년 봄에 홋카이도(北海道) 소재 아사지노(淺茅野)비행장으로 동원되었고, 그의 아들인 전우식은 오사카(大阪)에 있는 기관차 제조공장으로 동원되었다. 아들은 강제동원지에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홋카이도로 직접 가서 아버지의 유골을 직접 화장하였다.
전해평은 사망진단서에서 1943년 12월 25일 기관지염과 대장염으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된다. 아들 전우식이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홋카이도에 도착한 날짜는 1월 1일. 전해평의 사망 소식은 가족들에게 바로 전해졌던 것 같다. 사망진단서를 발급한 곳은 하마톤베쓰(浜頓別) 소재 히로야마(弘山) 병원이다. 또한, 전해평의 아들 전우식은 하마톤베쓰 병원에 입원해 있던 고향 사람을 방문했던 경험을 진술하였다. 아사지노 비행장에서 다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은 인근의 히로야마 병원과 하마톤베쓰 병원을 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전해평의 사망 기록은 하마톤베쓰초(浜頓別町) ‘매화장인허증’에도 남아있다. 당시에 매장(埋葬) 또는 화장(火葬)을 하기 위해서는 사망자의 사망진단서를 해당 지방관청에 제출한 후, 매·화장인허증(埋·火葬認許 證)을 받아야 했다. 전해평의 화장은 히로야마 병원에서 발급한 사망진단서를 근거로 하마톤베쓰관청에서 매화장인허증을 발급받은 후 집행되었을 것이다. 그의 매화장인허증 기록에서 그가 단노구미(丹野組) 소속으로 일하였음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