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앙가우르 광업소
개요
제목 | 앙가우르 광업소 | 국가 / 지역 | 팔라우 공화국 / 앙가우르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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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팔라우 앙가우르 (Angaur, Palau ) | |||
강제동원 시설 | 광산, 전투 | 피해 유형 | 노무자, 군무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남양척식주식회사 | 동원 방식 | 모집 |
현재 | - | 피해 인원(추정) | 약 800명 |
설명
역사
앙가우르(Angaur)섬은 태평양 미크로네시아(Micronesia)에 있는 팔라우 제도(Palau islands)의 부속 도서이다. 팔라우 제도의 남쪽 끝에 위치한 산호섬이며, 남북 약 4㎞, 동서 3㎞, 면적은 12㎢이다.
앙가우르는 인광(燐鑛)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는데, 1908년에 인광을 채굴하기 위해 독일남양인광회사(獨逸南洋燐鑛會社)가 세워졌고 1909년부터 채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이 승전국이 되면서 독일이 통치하고 있던 남양군도(南洋群島)를 위임 통치하게 되었고, 이때 독일남양인광회사로부터 인광 채굴권을 사들였다. 1922년 4월에 남양군도를 관리하는 남양청(南洋廳)이 발족했고, 남양청이 앙가우르의 인광 채굴을 위한 남양채광소(南洋採鑛所)를 설치하면서 앙가우르에서의 인광 채굴이 시작된다. 이후 1936년에 남양군도를 개발하기 위해 남양척식주식회사(南洋拓殖株式會社)가 설치되는데, 앙가우르 광업소를 인수하여 채굴 사업을 이어 갔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앙가우르섬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인광 채굴을 주로 하다가 군부(軍夫)로서 미군과의 전투에 강제로 배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은 점차 노동력 부족에 직면하게 되는데, 남양척식주식회사는 앙가우르섬의 인광 채굴을 위해 1941년부터 조선인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남양척식회사는 조선총독부의 알선을 요청했고, 조선총독부는 이를 하달하여 여러 군에서 조선인을 동원했다. 이와 같이 조선인들은 남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총독부의 공조로 인해 앙가우르섬을 비롯한 남양군도에 동원되었다.
당시 조선인들이 언제부터 앙가우르에 동원되었고 그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몇몇 자료들을 통해 대략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먼저『중부 태평양 육군작전(2)』에 따르면 1943년 6월 말에 팔라우 제도 거주민은 총 34,022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이 2,460명이었으며 앙가우르섬에는 539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노동자 모집 관계 부책 번호 5번 121호』에는 남양척식주식회사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가 국적별로 나타나 있는데, 1943년 11월 말 당시 1,348명이 있었고, 이 중 조선인은 총 718명이며 앙가우르 광업소에는 49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3년 당시 앙가우르섬에는 500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반도 노동자 군별 명부』에서는 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앙가우르섬에 동원되고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자료는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앙가우르 광업소를 포함하여 남양척식주식회사가 운영하는 광업소의 조선인 명부 기록이다. 이 명부는 번호, 본적, 주소, 성명, 생년월일, 연령, 도항 일시, 배속지 등이 기재되어 있다. 남양척식주식회사는 1941년 3월 5일 11명, 10월 16일 250명, 12월 6일 41명, 1942년 7월 24일 158명, 7월 28일 72명, 9월 18일 209명, 1943년 5월 9일 285명, 1944년 1월 14일 184명, 1월 24일 38명 등 9차례에 걸쳐 1,405명의 조선인을 동원했고, 앙가우르 광업소에는 충청북도 출신의 805명이 동원되었다. 앙가우르섬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계약 만료로 귀국하기로 되어있는 상태였지만, 잔류 압력을 받아 제때 돌아올 수 없었고, 잔류하게 된 조선인들은 미군과의 전투에 동원되기에 이른다.
앙가우르섬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펠레리우 전투와 앙가우르 전투에 군부로서 강제적으로 배치되기도 했다. 미군은 1944년 1월부터 마셜 제도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3월 말부터 팔라우 제도에 대한 폭격도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은 관동군 소속인 제14단을 팔라우 제도에 파견하는 한편 펠렐리우(Peleliu Island)섬과 앙가우르섬 주민들을 바벨다오브(Babeldaob) 섬으로 이동시키는데, 당시 증언에 따르면 동원되었던 조선인 노동자와 주민 중 청장년 남자는 군부로 일본군에 협력하도록 강요받았고, 180여 명이 군부가 되었다. 앙가우르섬에서 강제적으로 군부가 된 조선인들은 미군과의 전투에 동원되면서 일본군과 함께 사망했고, 바벨다오프 섬으로 이동한 일부 조선인들은 생존하여 전쟁이 끝난 뒤 귀환선을 타고 돌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 출처: 김명환, 『남양군도 지역 한인노무자 강제동원 실태에 관한 조사(1939~1941)』,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009, p.104.
※ 출처: 김명환, 『남양군도 지역 한인노무자 강제동원 실태에 관한 조사(1939~1941)』,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009, p.106.
참고문헌
- 김명환, 『남양군도 지역 한인노무자 강제동원 실태에 관한 조사(1939~1941)』,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009.
- -----, 『1944년도 남양청 동원 조선인 노무자 피해실태 조사』,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2.
- 조성윤, 『남양군도: 일본제국의 태평양 섬 지배와 좌절』, 동문통 책방. 2015.
- -----, 『남양군도 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팔라우 앙가우르 섬의 인광을 중심으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0.
- 平塚柾緒, 『徹底抗戦 ペリリュー・アンガウルの玉砕(太平洋戦争写真史)』, 月刊沖縄社,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