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하와이 포로수용소
개요
제목 | 하와이 포로수용소 | 국가 / 지역 | 미국 / 하와이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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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하와이주 에바 비치 올드 포트 위버 로드 2295 (2295 Old Fort Weaver Rd, Ewa Beach, Hawaii) | |||
강제동원 시설 | 포로수용소 | 피해 유형 | 군인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O.S.S. | 동원 방식 | 미상 |
현재 | C.I.A. | 피해 인원(추정) | 6명 |
설명
역사
하와이 포로수용소는 호놀룰루 근처의 샌드 아일랜드(Sand Island) 지역에 1941년 문을 열어 1943년 3월에 문을 닫았다. 하와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조선인 포로는 2,800여 명이었다. 샌드 아일랜드의 포로수용소는 올드 포트 위버로 이전되었지만, 당시를 기록한 사진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조선인 포로는 1943년 소위 '남양군도'로 불리는 마킨(Makin)과 타라와(Tarawa) 지역에서 일본군과 함께 잡히기 시작해, 1944년 사이판, 괌, 오키나와 등지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군인 및 군무원 등이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는 미군이 1943년 11월 마킨에 상륙하고, 1944년 6월 사이판과 1945년 4월에 오키나와 공격을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육군군속 군부(軍夫) 및 해군군속 공원이었다.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큰 문제가 없었다. 국제적십자사의 조사 결과, 포로들은 숙소에서 식사까지 적절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인 포로들은 군대 표준 천막에 8~9명이 수용되어 있었고, 충분히 지급되는 의복과 함께 세면기와 샤워 시설이 갖추어진 곳에서 청결하게 지낼 수 있었다. 또한 노역을 희망하는 자는 급여를 지급받았다.
다만, 조선인 포로 중 6명이 Napko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 및 한반도 공략이 현실화하자,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현재의 미 중앙정보국 Central Intelligence Agency의 전신)에서는 한반도 침투 작전 계획을 추진했는데, 그 일환으로 구상된 것이 Napko 프로젝트이다. 해당 프로젝트는 재미교포와 조선인 포로를 훈련시켜 잠수함을 통해 한반도 작전 지역에 침투하도록 계획되었다. 실제로도 Napko 프로젝트의 공작원들이 서울과 평양으로 침투하는 계획(각 Einec mission 및 Charo mission)이 세워지고, 황해도의 한 섬을 장악하고 주민을 전향시켜 상륙의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계획이 세워지기도 했다(Mooro mission). 하지만 8월 15일 전쟁이 끝남에 따라 위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위의 6명은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도 없이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다시 이송된 후 귀국했다.
제네바협정은 포로를 적국의 군대에 복무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마에서 포로가 된 3명의 학병 출신 조선인과 사이판에서 포로가 된 해군 군무원 3명, 총 6명의 조선인 포로는 한반도 침투를 위한 훈련을 받다가 다시 포로로 전락했다. 조선인 포로 6명을 Napko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고, 한반도 침투를 목적으로 훈련시킨 것은 제네바협정 위반이라 할 수 있다.
사진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 출처: 이세일, 위의 자료, p.13.
참고문헌
- 이세일, 『하와이 포로수용소 한인포로에 관한 조사』, 국무총리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