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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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사할린 오지 제지

개요

사할린 오지 제지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 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사할린 오지 제지 국가 / 지역 러시아 / 사할린주
현주소 사할린주 (Сахали́нская о́бласть)
강제동원 시설 광산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오지제지(주) 동원 방식 모집, 관알선, 징용
현재 오지제지(주) 피해 인원(추정) 16,113명 이상

설명

역사

사할린은 남북으로 948km에 걸쳐 뻗어 있는 러시아 최대의 섬으로, 러시아가 점령하기 이전, 나브흐, 오로크, 아이누족 등 선주민이 살고 있었다. 몽골은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사할린 지역을 세력권에 두었으며, 그 이후에 등장한 명나라 또한 사할린 선주민 부족을 세력 하에 편입시켰다.

17세기 이후 일본, 러시아, 청이 사할린을 두고 각축을 벌였다. 홋카이도(北海道) 남단에 위치한 마쓰마에번(松前藩)은 1635년 사할린에 탐험대를 파견하고, 1644년에는 사할린 지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코사크(Cossack) 부대가 1655년 아무르강 하류에 도착한 뒤 사할린에 도달했다. 이를 경계한 청과 러시아 사이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결국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이 아무르강 일대를 확보하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러시아는 캄차카에서 남하하여 쿠릴열도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과도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840년대에 프리스 해협(Vries strait)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장악했는데, 결국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일본이 쿠릴열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장하는 대신, 러시아는 사할린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을 할양받았고, 이곳에서 일본의 어업, 임업, 펄프 공업, 탄광업이 전개되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사할린의 탄전은 채산성 문제로 일찍부터 개발되지 않았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경기회복과 중일전쟁으로 석탄 수요가 증가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남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최소 16,113명이 강제로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동원된 직종을 보면, 석탄 광산이 10,505명, 금속 광산이 190명, 토목건축이 5,414명으로, 전체의 3분의 2에 가까운 10,699명이 탄광으로 동원되었다.

조선인들은 탄광뿐만 아니라 각지의 토목건축 공사장과 벌목장, 비행장 등의 군사시설 구축에도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강제동원 조선인의 더욱 정확한 동원 규모, 임금 체계, 생활실태 등은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또한 사할린 가미시스카(上敷香)와 미즈호(瑞穗)에서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과 강제동원 조선인 사이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불분명한 상태이다.

사진

사할린 오지 제지 위치 area_map_86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코르사코프 오지(王子) 제지 공장 터(2013년 5월) 코르사코프 오지(王子) 제지 공장 터(2013년 5월)

※ 출처: Google Map

홀름스크 오지(王子) 제지 공장 터(2017년 7월) 홀름스크 오지(王子) 제지 공장 터(2017년 7월)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김명환, 『사할린 강제동원 조선인들의 실태 및 귀환』,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1.
  • 방일권, 『사할린 미즈호(瑞穗)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조사』,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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