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해남도 군시설, 석록 철광
개요
제목 | 해남도 군시설, 석록 철광 | 국가 / 지역 | 중국 / 중국 해남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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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중국 해남성 해남특별행정구 (中國海南省海南特別行政區) | |||
강제동원 시설 | 토건업(비행장), 광산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일본질소비료(주) | 동원 방식 | 미상 |
현재 | JNC(주) | 피해 인원(추정) | 약 2,000명 이상 |
설명
역사
해남도(海南島)는 중국 광동성 뇌주반도(雷州半島) 남쪽에 위치한 섬이다. 면적은 33,210k㎡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섬이다. 동쪽과 남쪽은 남중국해, 서쪽은 통킹만과 접하고 있다. 예전부터 여족(黎族), 묘족(苗族), 장족(壯族) 등의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해남도에 대한 일본의 야심은 군사적 침략을 감행한 1939년 이전부터 축적되었다. 20세기 초부터 대만총독부와 연계하여 여러 조사를 수행했는데, 특히 광산 자원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해남도는 광산, 해양, 산림 등 각종 자원이 풍부하다. 더욱이 중국 광동성과 인도차이나, 대만, 남양군도와 연결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지정학적인 의미도 크다. 화남(華南, 광동성 등 중국 남부) 지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을 포섭하는 군사기지로서, 동시에 군수물자 생산에 긴요한 철광석과 목재를 확보하는 원료보급기지로서 해남도를 경영하고자, 1939년 일본은 해남도를 침략했다.
일본은 1937년 7월 7일 노구교(盧溝橋) 사건을 통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39년 2월 10일 해남도를 침공한 뒤, 패전까지 6년 6개월에 걸쳐 해남도를 식민 지배했다. 식민 지배 기간에 일본은 전쟁물자 조달을 위한 일련의 전시경제개발정책을 수립하고, 일본 해군의 비호하에 일본과 대만의 농, 공, 상업 기업들을 동원하여 각종 개발에 나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남도 현지민만으로는 노동력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인과 중국인이 해남도로 강제동원되었다. 이들은 기업이 소관하는 지역에서 일하거나 해군이 지휘하는 군사시설 건설에 동원되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해남도에 보내진 조선인은 수형자들이었다. 일본은 1939년부터 남양군도에 수형자들을 보냈다. 일본 내 형무소 수형자들을 티니안섬, 트럭섬 등에 남방적성대(南方赤誠隊), 도남보국대(圖南報國隊)라는 명목으로 송출한 것이다. 일본은 러일전쟁 시기부터 형무소는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수형자들에 의해 감옥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는 만큼, 값싼 노동력과 보안이 동시에 충족되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감옥 작업뿐만 아니라, 수형자들은 외부 공장에서의 외역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특히 소위 '결전 체제'라 불리던 1943년 이후 수형자들은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조선인 수형자들의 해남도 강제동원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내무대신 유자와 미치오(湯澤三千男)가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게 1943년 4월 12일 자로 보낸 ‘조선총독부 수형자 해남도 출역에 따른 감독직원 등 증원에 관한 건’에 따르면, 1943년 3월 30일부터 1944년까지 8차례에 걸쳐,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조선 각지의 형무소에서 2,000여 명을 징발하여 해남도로 보냈다. 조선총독부 법무국 형행과에서 편찬한 『조선의 행형제도(朝鮮の行刑制度)』(治刑協會, 1938)에 따르면, 1943년 조선의 재감자 총수는 23,532명이었는데, 전체 수형자의 8.5%가량이 해남도로 보내진 것이다.
해남도에 배치된 조선인 수형자들은 훗날 조선촌(朝鮮村) 남정촌(南丁村)에 주둔했다. 그리고 삼아(三亞) 및 능수(陵水)의 해군 시설 공사에 1,500여 명, 일본질소비료(주)가 개발을 맡은 석록(石碌)의 철광 채굴 작업에 500여 명이 배치되었는데, 이들 중 1,000여 명이 현지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위의 1,000여 명은 일본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했고, 그 시체는 '천인갱(千人坑)'에 묻힌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은 말라리아 등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집단학살'은 2차 자료 또는 풍문에 의한 증언에 근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무자가 풍토병에 걸리면 방치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소사(燒死)시키는 등, 일본이 조선인 1,000여 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사진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참고문헌
- 齊藤日出治, 「海南島における住民虐殺と統治政策―「Y作戰」に見られる日本のアジア侵略の構圖」, 『大阪産業大學論集』12(1), 2010.
- 朝鮮總督府法務局行刑課 편, 『朝鮮の行刑制度』, 治刑協會, 1938.
- 三重縣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勞働者(李基允・裵相度)の追悼碑を建立する會 편, 『紀伊半島・海南島の朝鮮人:木本トンネル・紀州鑛山・「朝鮮村」』, 三重縣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勞働者(李基允・裵相度)の追悼碑を建立する會,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