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만주 관동군
개요
제목 | 만주 관동군 | 국가 / 지역 | 중국 / 길림성 | |
---|---|---|---|---|
현주소 | 중국 길림성 장춘시 관성구 신발로 577호 (中國吉林省長春市寬城區新發路577號) | |||
강제동원 시설 | 군부대 | 피해 유형 | 군인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육군 | 동원 방식 | 징용 |
현재 | 육상 자위대 | 피해 인원(추정) | 약 18,500명 |
설명
역사
만주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 지방으로, 요령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과 내몽고 자치구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만주 지역에는 고조선, 고구려, 말갈, 선비, 발해, 거란, 여진, 몽고, 만주족 등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는데, 1625년 청나라 태조가 요양(遼陽)에서 심양(瀋陽)으로 천도하고, 1644년에 북경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뒤, 심양을 배도(陪都, 수도에 준하는 도시)로 삼았다. 1657년에는 만주 지역에 봉천부(奉天府)를 두었고, 많은 만주족이 관내 지방(關內地方, 산해관 서쪽 한족의 활동 강역)으로 이주했다. 1677년에는 만주족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연안과 두만강 북쪽 지역에 봉금령(封禁令)을 선포하여,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18세기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19세기에는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서 정착하기도 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군부와 관동군은 유조호(柳條湖)에서 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이것이 중국 측의 소행이라는 구실로 군벌 장학량(張學良)의 본영인 북대영(北大營)과 봉천성을 공격하고, 만주 지역 주요 도시를 점령하는 등 만주 침략에 나섰다. 그 결과 1932년 3월 1일,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 부의(愛新覺羅溥儀)를 옹립하여 만주국을 건국했다. 만주국은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통해 일본의 권익을 승인하고, 국방을 관동군에 위임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국은 독립 국가가 아닌, 일본의 괴뢰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일본은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인을 상대로 군인 동원을 시작했으며, 1944년부터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만 19세 이상의 조선인 청년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했다. 이렇게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실시된 지원병제도와 1944년의 학도지원병제를 통해 관동군으로 배치된 조선인은 총 3,080명이었다. 또한, 1944년부터 시행된 징병제를 통해 1944년 9,925명의 조선인이 관동군에 배치되었다. 다만, 위의 13,005명에 더해, 1943년 제1보충역으로 관동군에 배속된 인원과 1945년에 징병을 통해 관동군에 배속된 인원은 확인되고 있지 않은데, 각각 500여 명과 5,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다시 말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동원되어 관동군에 배치된 조선인은 18,500여 명에 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관동군은 소련군에 의해 무장이 해제되었고, 이때 일본인과 함께 3,000여 명에 달하는 관동군 소속 조선인들도 포로로 억류되어 시베리아 일대의 수용소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60에서 70명이 시베리아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
※ 출처: 조건,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 포로문제 진상조사』,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1, p.11.
※ 출처: 조건,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 포로문제 진상조사』,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1, p.21.
참고문헌
- 조건,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 포로문제 진상조사』,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1.
- 손춘일, 『만주지역 조선인 강제동원 등에 관한 연구』,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