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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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군시설

개요

오키나와 군시설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 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오키나와 군시설 국가 / 지역 일본 / 오키나와 열도
현주소 오키나와현 (沖縄縣)
강제동원 시설 육군 시설, 해군 시설 피해 유형 노무자, 군무원, 군인
관련
기업·기관
과거 육군, 해군 동원 방식 징용
현재 육상 자위대, 해상 자위대 피해 인원(추정) 약 2,022명

설명

역사

오키나와 열도는 일찍이 류큐(琉球)로 불리는 지역이었다. 14세기 초부터 15세기 초까지 약 1세기에 걸쳐 세 나라가 패권을 다투었다가 1429년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고, 이때부터 류큐 왕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류큐 왕국은 중국과 조공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1609년 일본의 사쓰마번(薩摩藩)의 침공에 굴복하여 중국과 일본 양국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일본은 류큐의 귀속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1872년 류큐번(琉球藩)을 설치했다(제1차 류큐 처분). 이어서 1879년에는 류큐와 청 사이의 조공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류큐현(琉球県)을 설치했다(제2차 류큐 처분). 이로써 1429년부터 450년간 존속했던 류큐 왕국은 멸망하고 일본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서서히 후퇴하며, 남태평양에서의 지배권을 잃어갔다. 1944년 2월에는 미군이 마셜(Marshall) 제도를 점령하고, 추욱(Chuuk) 제도에 공습을 실시했다. 이에 일본 대본영은 1945년 3월, 남서 제도(오키나와)의 방어를 위해 제32군을 창설했다. 대본영은 오키나와 열도에 15개의 비행장을 건설하고, 오키나와를 불침 항모로 만드는 것을 계획했다. 하지만 1944년 6월 미군이 사이판에 상륙하고, 같은 해 10월에는 필리핀 레이테 해전에서도 일본 해군을 괴멸시켰으며, 결국 1944년 10월 10일부터 오키나와의 나하(那覇)와 게라마(慶良間) 제도 등 주요 지역에 대한 대공습을 개시했다. 이후 1945년 7월 2일 미군이 오키나와 작전 종료를 선언할 때까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특히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3일까지 전개된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일본이 전투원 외에 민간인들까지 끌어들이며 '옥쇄(玉碎)'를 강요하기도 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오키나와 지역의 강제동원 피해자는 2,022명 이상에 달했다. 이를 다시 유형별로 살펴보면, 군인 130명, 노무자 139명, 군무원 1,753명으로, 군무원이 압도적인 비율(86.7%)을 점하고 있었다.

우선 일본 육군과 해군의 군인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독립공병 제60대대, 독립 비행 제23중대, 오키나와 전차 27연대, 선박군 해상정진 제26 전대 등에 배속되었으며, 총 130명 중 24명이 사망했고 4명이 행방불명되었다.

노무자들은 이시가키지마(石垣島) 해군비행장, 미야코지마(宮古島) 해군비행장, 이리오모테(西表) 탄광, 우타라(宇多良) 광업소 등에서 노동을 강요받았다. 전체 139명 중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군무원으로는 전체 1,753명이 강제동원된 것으로 파악되며, 이 중 451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집계된다. 특히 1,364명이 특설수상근무대로 파악되는데, 오키나와에 동원된 특설수상근무대는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2,800여 명이 징발되었다. 이들은 특수 기술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오키나와 수비를 위한 노역 부대로 동원되었기 때문에, '군속(軍屬)'이란 명칭으로 불리기보다 군(軍)에 소속된 인부(人夫)라는 뜻에서 '군부(軍夫)'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사진

오키나와 군시설 위치 area_map_82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미야코지마 해군비행장 터(현 미야코 공항)(2021년 10월) 미야코지마 해군비행장 터(현 미야코 공항)(2021년 10월)

※ 출처: Google Map

이리오모테 탄광 터(2020년 10월) 이리오모테 탄광 터(2020년 10월)

※ 출처: Google Map

우타라 탄광 터(2022년 7월) 우타라 탄광 터(2022년 7월)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김민영, 『오키나와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피해실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18.
  • 정병호, 『조선인 군노무자 지역별 동원실태: 오키나와 강제동원자의 구술과 사회적 기억을 중심으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0.
  • 沖本富貴子, 「沖縄戦に動員された朝鮮人に関する一考察―特設水上勤務隊を中心に―」, 『地域研究』2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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