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아소 탄광
개요
제목 | 아소 탄광 | 국가 / 지역 | 일본 / 후쿠오카현 이즈카시 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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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후쿠오카현 이즈카이시 쓰나와키 620-47 등 (福岡県飯塚市綱分620-47) | |||
강제동원 시설 | 탄광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아소 광업 | 동원 방식 | 모집, 관알선, 징용 |
현재 | 아소 그룹 | 피해 인원(추정) | 약 10,600명 |
설명
역사
아소 탄광(麻生炭鉱)은 아소 광업(麻生鉱業)이 운영하고 있었던 광업소와 갱들을 말한다. 아소 광업은 아소 다키치(麻生太吉)가 후쿠오카현(福岡縣)의 이즈카시(飯塚市)와 그 주변 일대에 위치한 일본의 대표적인 탄전인 지쿠호(筑豊) 탄전에서 석탄을 채굴하면서 성장했다.
지쿠호 탄전은 무로마치(室町) 막부 시대 때 처음으로 석탄이 발견되었고 이후 메이지 정부(明治)의 ‘광산개방령’(鉱山解放令, 1872년)을 통해 관민의 본격적인 탄광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때 지역 자본가였던 아소 다키치를 비롯한 미쓰비시(三菱) 광업, 미쓰이(三井) 광업, 닛테쓰(日鉄) 광업, 스미토모(住友) 석탄광업 등 여러 자본가가 지쿠호 탄전에서 석탄 채굴 사업을 진행했다. 1901년에 후쿠오카현 기타규슈시(北九州市)에 위치한 야하타 제철소(八幡製鉄所)가 운영되기 시작하면서, 지쿠호 탄전 일대의 석탄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1911년의 석탄 생산량은 약 800만 톤으로 1891년과 비교하면 8배 이상이었고 이는 일본 전국 석탄 생산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생산량이었다.
아소 다키치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계기로 석탄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 속에서 마메다 탄광(豆田炭鉱, 1905년), 쓰나와키 탄광(綱分炭鉱, 1906년), 요시쿠마 탄광(吉隈炭鉱, 1909년), 구바라 탄광(久原炭鉱, 1910년), 아카사카 탄광(赤坂炭鉱, 1913년) 등에서 석탄 채굴을 하면서 탄광업을 계속 확장해 나갔다. 아소 다키치는 이와 같은 탄광업 확장과 함께 운송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시켰고, 중의원, 지쿠호 석탄광업조합 총장, 석탄광업연합회 회장 등 일본의 정계와 재계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아소 다키치는 1918년에 주식회사인 아소 상점(麻生商店)을 출범시켰고, 1933년에 사망한 후 손자였던 아소 다카기치(麻生太賀吉)가 가업을 계승한다. 그는 1941년에 회사명을 아소 광업으로 변경했고, 아시아·태평양 전쟁 중에는 인도네시아 지역에서도 탄광 사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일본 패전 이후 아소 광업은 미쓰비시, 미쓰이와 같은 재벌 기업 해체 대상에 해당되지 않았으며, 현재는 아소 그룹의 속해 있다. 아소 그룹은 2023년 3월 현재 117개사, 연매출 7,577억엔, 사원 17,028명의 규모로 후쿠오카현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편 아소 다카기치의 장남인 아소 타로(麻生太郎)는 정치인으로서 제92대 일본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조선인들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 이전 1923년대부터 아소 광업이 운영하는 탄광에서 노동을 시작했다. 1928년에는 5,673명 중 360명, 1932년에는 5,160명 중 1,07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고, 전체 노동자 중 조선인의 비율은 6%에서 23%로 아소 탄광에서 노동하는 조선인들의 수는 증가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노무자들이 강제동원되는 방식은 기업이 요청하면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검토와 협의를 거쳐, 조선 내 지역과 인원을 할당하여 요청 기업으로 동원했는데, 아소 광업도 동일한 방식으로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에 아소 광업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수는 1946년에 후생성이 작성한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소 탄광 10,623명(1939년 827명, 1940년 1,235명, 1941년 2,095명, 1942년 2,126명, 1943년 1,804명, 1944년 1,804명, 1945년 472명), 구바라 탄광(1943년 11명, 1944년 106명, 1945년 71명) 등 10,821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탄통제회 노무부 경성사무소가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아소 광업은 1943년에만 2,200명의 노무자를 할당받아 그중 1,989명의 조선인을 동원했으며, 후쿠오카현에서 작성한『현정중요사항』의 ‘이입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표’에 따르면 1944년 1월 현재 7,996명의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1943년 5월부터 1944년 7월까지는 3,540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다. 해당 기간에 요시오 탄광(芳雄炭鉱)에서는 2,871명 중 1,308명, 쓰나와키 탄광에서는 2,352명 중 1,148명, 요시쿠마 탄광에서는 2,317명 중 963명, 마메다 탄광에서는 515명 중 62명, 구바라 탄광에서는 297명 중 59명의 조선인이 노무자로서 동원되었다. 전체 노무자 중 약 42%가 조선인들이었으며, 이를 통해 아소 광업이 석탄을 생산하는 데에 있어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상당히 동원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 출처: 심재욱, 위의 자료, p.103.
※ 출처: 『아소 광업 진상조사 자료집』, 2011, p.104.
※ 출처: 『아소 광업 진상조사 자료집』, p.105.
※ 출처: Google Map
※ 출처: Google 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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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인덕, 『노무동원 경로 연구: 국민징용, 할당모집, 관알선』, 2020.
- 심재욱, 『전시체제기 규슈(九州)지역 ‘아소(麻生)광업(주)’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진상조사』,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1.
- 麻生グループホームページ https://www.aso-group.jp/index.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