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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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바리 탄광

개요

오유바리 탄광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오유바리 탄광 국가 / 지역 일본 / 홋카이도 유바리시
현주소 홋카이도 유바리시 다카마쓰 (北海道 夕張市 高松)
강제동원 시설 탄광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 (三菱鑛業株式会社) 동원 방식 모집, 관알선, 징용
현재 미쓰비시 머티리얼 (三菱マテリアル) 피해 인원(추정) 약 4,000명

설명

역사

오유바리 탄광(大夕張炭鉱)은 이시가리 탄전(石狩炭田) 남쪽의 유바리 탄전(夕張炭田)에 위치한 탄광이다. 유바리 탄전은 일본 유수의 탄전 지대로 유바리시(夕張市)에는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三菱鉱業株式會社)이 운영하던 오유바리 탄광과 함께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가 운영하던 유바리 탄광(夕張炭鉱), 헤이와 탄광(平和炭鉱) 등 여러 탄광들이 있었다.

1888년에 유바리시 지역에서 석탄이 발견되었고 1907년에 오유바리 탄광회사(大夕張炭鉱會社)가 설립되었다. 1916년에 미쓰비시 합자회사(三菱合資會社)에 매각된 후 운영을 계속하다가 1990년에 폐광되었다.

1911년에는 오유바리 지역의 석탄 등을 운반하기 위해 오유바리 탄광 전용철도(三菱大夕張鉄道)가 부설되었고, 1929년에는 쓰도역(通洞駅)이 만들어졌다. 쓰도역은 1938년에 오유바리 탄광역(大夕張炭鑛驛)으로 개칭되었으며, 1973년 말까지 이용되었다. 1906년부터 사용되었던 철도 차량은 이를 보존하려는 시민단체들이 보수하여 미나미 오유바리역(南大夕張驛)에 공개되고 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유바리시 지역에는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 이전부터 조선인들이 노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912년 말에 이시가리 탄광(石狩炭鉱)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한 기록이 있으며, 1916년 경에는 조선인 35명이 유바리 탄광에서 일했다고 한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유바리시 지역에 20,000명을 넘는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되었는데, 오유바리 탄광에는 약 4,000명이 강제동원되었다고 추정된다. 1942년 10월 말과 1943년 5월 말 현재 각각 518명과 1,178명, 1945년 6월 말 현재 1,936명의 조선인들이 오유바리 탄광에 강제동원되어 노역하고 있었다. 오유바리 탄광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다섯 곳의 기숙사에 수용되었고, 전라남도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한편 오유바리 탄광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는 오유바리 탄광으로 강제동원되었을 때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모집을 왔어. 왜놈들이~ 모집을 와서 소집했어. 소집한 데서는 인제 며칟날 간다고 이렇게 해. ···(중략)··· 그래 뽑아 가지고 며칟날 오라해서 김천까지 그리 갔지. ···(중략)··· 거기 와서 인제 잤지. 자고 그 이튿날 간다고 하고서 머리를 고만 이발소가 전부다 빡빡 다 깎았어. ···(중략)··· 도망가면 찾기 좋으라고. 그리고 옷을 줬는데, 그때 여기서는 한복 이런 거 입지? 그 사람들이 입으라고 [옷을] 가져오는데, 꼭 옷도 푸대자루 같애. 이렇게 막 굵은 실로 짜가지고, 얼금얼금하니 이상해, 그것도 옷이라고. 그 한 벌씩 줘요. 그놈 입고 인제 간다. 기차 타면 고 칸막이(출입문) 안 있어? 이쪽에 있고, 저쪽에 거 양쪽에 있거든. 고 둘씩 요래 바르고 섰어(지키고 서 있어). 우리는 거 앉았다가 누워 자고. 모두 차간에서 잠깐 누워 잤지. 뭐~ 그래 누워 자는데 차 복판에다 바케스에 물 떠다 놓고, 물 먹고 싶으면 물 먹으라고. 목마르면 떠다 먹고…. 하모. 양쪽으로 그래 서 있으니까 어디 가도 못해. 소변 볼라하면 인제 거(지키고 서 있는 사람에게) 가서 소변보러 왔다 이렇게 하면 가서 소변보고 그래.

이와 함께 피해자의 오유바리 탄광에서의 생활을 정리해 보면, 피해자가 있었던 ‘함바’라고 불린 일심료(一心寮) 기숙사에는 300명의 조선인들이 15개의 방에 각각 20명씩 있었고, 2층으로 된 다른 기숙사에는 600명 넘게 있었다고 한다. 쉬는 날도 한 달에 한 두번 밖에 없었고 간부들이 사람을 개 패듯이 팼다고 하며, 2년 기한이었는데, 계속 일하게 해서 총 4년을 오유바리 탄광에서 노역했다고 한다. 일을 하다가 천장에서 돌이 떨어져 허리를 다쳤었는데, 치료비도 없고 사람을 부려먹기만 했다고 증언했다.

오유바리 탄광에 강제동원되었던 조선인 213명은 1941년 6월 25일에 유바리 경찰서를 습격한 일도 있었다. 213명의 조선인들은 그들이 생활하고 있었던 기숙사의 장에게 식사 문제로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일방적으로 기숙사 관리자 편을 든 경찰을 폭행한 것이다. 이때 유바리 경찰서가 34명의 조선인을 끌고 갔는데, 조선인들이 쫓아와 경찰들을 폭행하고 돌을 던지기도 했다. 다른 기숙사에 살고 있었던 조선인들까지 합류한 800명의 조선인들이 경찰을 폭행하고 경찰서로 쳐들어가는 등 무력 시위를 펼쳤다.

사진

오유바리 탄광 위치 area_map_08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오유바리 탄광 신샤 갱의 재료 갱 입구(新斜坑材料坑口)(2021년 5월) 오유바리 탄광 신샤 갱의 재료 갱 입구(新斜坑材料坑口)(2021년 5월)

※ 출처: 産業遺産の旅ホームページ

미쓰비시 오유바리 철도 터(三菱大夕張鉄道跡) 1(2023년 5월) 미쓰비시 오유바리 철도 터(三菱大夕張鉄道跡) 1(2023년 5월)

※ 출처: Google Map

미쓰비시 오유바리 철도 터(三菱大夕張鉄道跡) 2(2023년 5월) 미쓰비시 오유바리 철도 터(三菱大夕張鉄道跡) 2(2023년 5월)

※ 출처: Google Map

오유바리 탄광 관련 노동자 기숙사 앞 단체사진
(피해자는 1943년 7월 경부터 오유바리 탄광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오유바리 탄광 관련 노동자 기숙사 앞 단체사진

※ 출처: 과거사 관련 업무 지원단 홈페이지( https://www.pasthistory.go.kr/)의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동행자 찾기

오유바리 탄광 관련 노동자 기숙사 앞 단체사진
(피해자는 1941년 9월 경부터 오유바리 탄광에 동원되었으며, 상기 사진은 탄광에 들어가자마자 같이 동원된 김천 일행과 찍은 사진이라고 함)
오유바리 탄광 관련 노동자 기숙사 앞 단체사진

※ 출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아홉머리 넘어 북해도로–홋카이도 강제 피해 구술 자료집』, 2009, p.148.

참고문헌

  • 노영종,「일제 말기 충남지역 노동력 강제동원과 거부투쟁」, 충남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9.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아홉머리 넘어 북해도로–홋카이도 강제 피해 구술 자료집』, 2009.
  • 朝鮮人強制連行真相調査団編,『朝鮮人強制連行強制労働の記録-北海道·千島·樺太篇』, 現代史出版会, 1974.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松村高夫,「第2次世界大戦期の朝鮮人強制連行·強制労働(資料)」,『三田学会雑誌』Vol.83 No.3, 1990.
  • 과거사 관련 업무 지원단 홈페이지 https://www.pasthistory.go.kr/
  • コトバンクホームページ https://kotobank.jp/
  • 産業遺産の旅ホームページ ( https://hokkaido-mine.gyopinosuke.com/)
  • 北海道空知総合振興局ホームページ https://www.sorachi.pref.hokkaido.lg.jp
  • 炭鉄港デジタル資料館ホームページ https://3city.net/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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