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국민통합과 평화, 인권신장에 기여

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벳시 동산

개요

벳시 동산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 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벳시 동산 국가 / 지역 일본 / 에히메현 니하마시
현주소 에히메현 니하마시 일대 (愛媛縣新居浜市)
강제동원 시설 광산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스미토모광업(주) 동원 방식 미상
현재 스미토모 금속광산(주) 피해 인원(추정) 미상

설명

역사

에이메현(愛媛縣) 니하마시(新居濱市)에 있는 벳시 동산(別子銅山)은 1691년 채굴을 시작하여 1973년에 폐산되기까지 283년간의 역사가 있다. 벳시 동산은 겐로쿠기(元祿期, 17세기 말)에 세계 최고의 동 산출량을 기록하는 등,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의 일본을 대표하는 동산의 하나였다. 개갱(開坑)부터 폐산까지 일관적으로 스미토모에서 운영했다. 1893년에는 동 정련에 발생한 가스에 의한 농작지 피해가 발생했고, 그 후로도 수년에 걸친 연해(煙害)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39년 이후 벳시 광업소(別子鑛業所)에서는 일본인 노동자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인, 중국인 등을 강제로 동원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벳시 광업소에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700명의 조선인이 이입되어 있었다. 다만, 『반도인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半島人勞務者ニ關スル調査報告)』에서는 1940년 3월 시점에서 벳시 동산에 '고용(雇入)'된 조선인은 76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1940년 3월 이후 조선인의 이입이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1943년 4월에는 고노마이 광산(鴻之舞鑛山)에서 244명의 조선인이 가족 27명과 함께 이입되었다. 이에 더해 1944년 에히메신문(愛媛新聞)의 2월 25일 4면에 인원수는 '반도의 소년 전사, 시사카지마(四坂島) 공장에서 입소식'이라는 기사가 있으며, 같은 해 11월 14일 2면에는 '반도 노무자 광산 입소식'이라는 문언이 확인된다(인원수 확인 불가). 즉 적어도 700명에 244명을 더한 944명 이상의 조선인이 노동에 동원되고 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단 이들 중 정확히 몇 명이 강제로 동원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기한 『반도인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에 따르면, 1940년 당시 조선인 1명의 한 달 평균 실수입은 62엔 11전이었으며, 이 중에서 29엔을 송금하고 19엔 10전을 저금했다. 다만, 일본인과 같은 규정으로 임금이 지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또한 해당 보고서의 '반도인은 어떠한 작업에 적합한가에 대한 감상'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① 대체로 지능이 낮다(시험 삼아 기리하라식 일반 지능검사를 실시한 결과, 득점이 내지인의 약 3분의 1 정도). 따라서 단순한 작업에 적합하며, 머리 회전을 요하는 작업, 적시 적절한 처치를 요하는 작업에는 빠른 능률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② 대체로 여력(膂力)이 강하다. 따라서 특히 여력을 요하는 작업에는 훈련에 따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드리프터'의 선봉이 좋은 예로 인정된다.
③ 단독 작업에는 적합하지 않다. 내지인 광원(鑛員)을 섞음으로써 더욱 능률을 올릴 수 있다. 여러 명이 하나의 그룹(一團)이 되어 지휘자를 따르는 작업에는 상당한 성적을 기대할 수 있다.
④ 현장의 감독자에 대해서는 순종하지만, 감독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는 게으름을 피우기 때문에 감독을 느슨히 할 수 없다.
⑤ 책임 관념이 희박하고,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넘어가려는 버릇이 있다.

당시 조선인 노무자들은 인식 면에서 일본인보다 힘은 강하지만 지능이 낮으며, 게으르고, 책임 의식이 약하다는 차별과 멸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오노우에 마모루(尾上守)와 마쓰바라 미쓰노리(松原滿紀)의 『스미토모 벳시 동산에서 '박순동'이 죽었다(住友別子銅山で<朴順童>が死んだ)』에서는 벳시 동산에 동원된 조선인 9명에 대한 청취 조사를 수행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6명은 광석 운반과 채광 등의 노동을 담당했으며,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벳시 광업소의 '주력은 한국인'이었다. 다만, 노동은 3교대였는데 일본인과의 시간상의 차별은 없었다.

사진

벳시 동산 위치 area_map_79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벳시 동산 색도(索道)기지 터(2021년 10월) 벳시 동산 색도(索道)기지 터(2021년 10월)

※ 출처: Google Map

변전소 터(2021년 7월) 변전소 터(2021년 7월)

※ 출처: Google Map

벳시 동산 기념관(2022년 12월) 벳시 동산 기념관(2022년 12월)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菊池繪里, 「別紙銅山の戰時中における外國人勞働者の實態と役割」, 第33回法政大学懸賞論文優秀賞, 2010.
  • 日本鑛山協會 편, 『日本鑛山協會資料 第78輯 半島人勞務者ニ關スル調査報告』, 日本鑛山協會, 1940.
  • 別子銅山記念館ホームページ https://www.sumitomo.gr.jp/history/related/besshidouzan/museum.htm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