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조세이 탄광
개요
제목 | 조세이 탄광 | 국가 / 지역 | 일본 / 야마구치현 우베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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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야마구치현 우베시 요시키군 니시기와촌 도코나미 (山口縣宇部市吉敷郡西岐波村床波) | |||
강제동원 시설 | 탄광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 | 동원 방식 | 모집 |
현재 | - | 피해 인원(추정) | 1,258명 이상 |
설명
역사
조세이 탄광(長生炭鑛)은 야마구치현(山口縣) 우베시(宇部市)에 위치한 우베 탄전(宇部炭田)에 속하는 해저 탄광이었다. 조세이 탄광에 강제동원되어 노역을 하던 조선인 130여 명이 수몰 사고 탓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세이 탄광의 숙소에는 조선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어서 당시 조세이 탄광을 ‘조선 탄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베 탄전은 우베시를 비롯한 그 주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야마구치현 주변의 위치하고 있는 탄전 중에서 규모도 가장 크고 석탄도 가장 많이 생산했던 탄전이었다. 우베 탄전은 석탄 생산량의 90%가 해저 탄광을 통해 생산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며, 전성기였던 1940년에는 대표적인 탄광인 오키노야마 탄광(沖ノ山炭鑛)과 히가시미조메 탄광(東見初炭鑛)을 포함하여 약 59개의 탄광이 있었다.
조세이 탄광은 우베 탄전에 속한 중소 규모의 탄광으로 1914년부터 채굴을 시작했다. 1922년 5월에 수몰이 되어 채굴 작업을 중단했다가 1932년 11월에 제1 갱에서 다시 채굴을 시작했다. 1941년에는 석탄 생산량이 정점에 달하면서 오키노야마 탄광과 히가시미조메 탄광에 이어 우베 탄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석탄을 생산하는 탄광이 되기도 했다. 1942년 1월에 수몰 사고로 인해 제1 갱이 폐쇄되고 동년 6월에 제2 갱, 11월부터는 제3 갱에서 채굴 작업을 실시했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1945년에 폐광되었고, 현재 탄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은 바다 위로 보이는 2개의 배기구가 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조세이 탄광은 모집 방식으로 조선인들을 강제동원 했다. 1939년 450명, 1940년 800명, 1941년 350명 등 3년 동안 1,630명의 조선인을 동원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동원된 조선인들의 수는 1939년 249명, 1940년 483명, 1941년 430명이었다. 1942년 6월 말 현재 총 1,258명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들은 충청남도, 경상북도 출신이었는데, 약 66%에 해당하는 831명이 경상북도 출신이었다.
모집을 통해 동원된 조선인들은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시(下関市)를 거쳐 조세이 탄광에 도착했고, 나흘에 걸친 교습 기간을 가진 후 3개월 동안 보조 작업을 담당했다. 조선인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정액제(임금×작업 일수)와 청부제(청부단가×작업 일수)로 나뉘어 지급되었다.
조세이 탄광에 강제동원된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들은 울타리에 둘러싸인 기숙사에서 생활할 것이 강요되었고, 도리시마리(取締)라고 불리는 감독관에 의해 기숙사 출입이 통제되는 등 열악한 생활을 강요받았다. 조세이 탄광은 노동 조건이 열악하고 사고의 위험성이 높았기 때문에 노무자들이 탈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노무자들에게 꺼려지는 탄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세이 탄광에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도 노역 중에 탈출하는 경우가 발생했는데,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숙소 출입구를 입구(口)자 모양으로 만들고 하나의 출입구만 사용하게 했으며, 같은 숙소라고 하더라도 다른 동으로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한 일본인들은 임금을 이용하여 조선인들의 탈출을 방지하려고 했는데, 조선인 노무자들에게는 직접 현찰로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고 강제저축의 형태로 임금이 지급되었다. 한편 조선인 노무자들은 탄광의 채탄부 소속으로 노역을 강요당했으며, 2교대로 투입된 조선인 노무자는 작업시간 동안 일절 탄광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고, 탄광 내부로 물이 들어오는 상황이라도 일본인 관리자의 지시 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만일 조선인 노무자가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될 경우 사무실로 끌려가 구타당했다.
한편 1942년 2월 3일 오전에 조세이 탄광이 수몰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제1 갱이 바닷물에 의해 침수가 되어 당시 작업을 하고 있었던 노무자 183명이 사망한 사고였다. 사망자 중 조선인 노무자는 70%에 해당하는 13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사고 발생 이후 많은 조선인 노무자가 조세이 탄광에서 탈출을 시도했고,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조선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없었다. 이들은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일본 내 다른 지역의 탄광, 군수 공장에서 노무자 생활을 이어 갔다.
사진
※ 출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앞의 자료, p.8.
※ 출처: Google Map
※ 출처: Google Map
※ 출처: Google Map
좌측에 ‘한국·조선인 희생자’, 우측에 ‘일본인 희생자’라고 쓰여 있음.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김인덕, 『노무동원 경로 연구: 국민징용, 할당모집, 관알선』, 2020.
-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죠세이(長生)탄광 수몰사고 진상조사』, 2006.
- 長澤秀,「山口縣・長生炭鉱(株)と朝鮮人強制連行-会社側文書を中心に-」, 『海峡』第16号,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