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히로시마 조선소, 히로시마 기계 제작소
개요
제목 | 히로시마 조선소, 기계 제작소 | 국가 / 지역 | 일본 /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 |
---|---|---|---|---|
현주소 |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나카구 에바오키마치 5-1 등 (広島県広島市中区江波沖町5番1号) 등 | |||
강제동원 시설 | 조선소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미쓰비시 중공업 | 동원 방식 | 징용 |
현재 | 미쓰비시 중공업 | 피해 인원(추정) | 약 1,900 ~ 2,800명 |
설명
역사
미쓰비시 중공업(三菱重工業)의 히로시마 조선소와 기계 제작소는 설립 당시 수송선과 기계를 생산하는 업체였으나, 현재는 미쓰비시 중공업 히로시마 제작소(広島製作所)로서 각각 에바(江波) 공장과 간논(觀音) 공장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항공기 부품, 제철 기계, 고무 타이어 기계 등을 생산하고 있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1944년 3월에 에바마치(江波町)에는 수송선을 건조하는 히로시마 조선소(広島造船所), 미나미칸온마치(南觀音町에는 기계 제조를 하는 히로시마 기계 제작소(広島機械製作所)를 각각 세웠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두 공장의 생산 설비가 파괴되었고, 일본의 패전 이후에는 두 공장이 미쓰비시 중공업 히로시마 조선소(三菱重工業広島造船所)로 합병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전쟁 특수로 조선 사업이 본격화되었고 고도 경제성장 시기에는 9,000명이 넘는 종업원을 보유하는 등 미쓰비시 중공업의 주력 공장이 되었다.
1970년대의 두 차례에 걸친 석유 위기로 인해 조선 사업이 불황을 맞이하면서 1980년에 이를 정리했고, 회사명을 히로시마 제작소로 변경했다. 이후 교량이나 크레인 등 육상구조물을 제작하는 사업과 여객기를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항공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미쓰비시 중공업 히로시마 조선소(히로시마 기계 제작소 포함)의 공탁금 명부를 보면 1,903명의 조선인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공탁금 명부에는 경기도 지역이 1,818명으로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수원 220명, 평택 130명, 포천 118명, 안성 111명, 개풍과 여주 각각 100명 등이다. 그 외 충청도 지역이 41명, 황해도 지역이 12명, 전라도 지역이 11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동원된 조선인들을 지도했던 후카가와 무네토시(深川宗俊)의 증언에 따르면 히로시마 조선소의 경우 1944년 7월 및 10월 700명씩, 기계 제작소의 경우 같은 해 5월과 8월에 700명씩 각각 1,400명씩 총 2,800명이 동원되었다. 기계 제작소에 동원된 한 피해자는 약 2,300명의 조선인이 노무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피해자 인원은 발견된 명부와 피해자 등의 진술로 추정된 것이고, 이보다 더 많은 조선인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히로시마 조선소와 기계 제작소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조선소의 경우 기타료(北寮), 기계 제작소의 경우 히가시료(東寮) 일부와 니시료(西寮)로 숙소가 배정되었다. 해당 숙소에서 조선인들은 소대·중대·분대로 나누어져 관리가 되었고, 기상-점호-식권 교부-조식-출근을 하는 생활을 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대부분 운반, 청소 등과 같은 단순한 업무를 담당했고 40원 또는 50원~60원의 월급을 받았지만, 월급의 절반은 강제저축 명목으로 수령하지 못했다.
한편 히로시마 조선소와 기계 제작소를 포함한 히로시마시 지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1945년 8월 6일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히로시마는 약 420,000명이 피폭을 당했으며, 이 중 약 160,000명이 사망했다. 조선들도 약 50,000명이 피폭되었으며, 이 중 30,000여 명이 사망하고 생존자 중 23,000명이 귀국했다. 피폭된 조선인 피해자는 히로시마 전체 피폭자의 10%를 넘고, 사망자 수 또한 20%에 가까웠다. 조선인들의 피폭자 중 사망자 비율은 약 60%인데, 이는 히로시마시의 전체 피폭자 중 사망자 비율이 약 40%인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이다. 이는 당시 군수 공장 등에서 일을 해야 하는 많은 조선인이 히로시마 도심 지역에서 미군의 공격에 대비한 소개(疏開) 작업에 투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히로시마 조선소와 기계 제작소 등지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강제동원의 피해뿐만 아니라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피해도 모두 겪게 되었다. 현재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는 재일본거류대한민국거류민단을 중심으로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을 기리기 위해 1970년 4월에 세워진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가 있으며, 2023년 5월 21일에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위령비를 함께 참배하기도 했다.
사진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김광열, 『태평양전쟁기 일본의 군수동원법 및 군수회사지정제도와 조선인 강제동원–일본과 조선에서의 제도 운용을 중심으로-』, 2020.
- 허광무, 『히로시마 · 나가사키 조선인 원폭피해에 대한 진상조사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를 중심으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1.
- -----,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제연구와 문제점」, 한일민족문제연구 제6호, 2004.
- 増矢学, 「第7回地域を支える企業 三菱重工業株式会社」, 『エネルギア地域経済レポート』 No.470, 2013.
- 三菱重工ホームページ https://www.mhi.com/jp
- 문화일보
- 한국일보
- KBS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