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오사카 육군조병창
개요
제목 | 오사카 육군조병창 | 국가 / 지역 | 일본 / 오사카부 오사카시 | |
---|---|---|---|---|
현주소 |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쿠 오사카조 大阪府大阪市中央区大阪城 | |||
강제동원 시설 | 육군 시설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육군 | 동원 방식 | 징용 |
현재 | 육상 자위대 | 피해 인원(추정) | 1,319명 이상 |
설명
역사
오사카 조병창의 전신인 오사카 포병 공창은 구 일본육군이 사용하는 병기를 생산하던 기관으로, 1870년 오사카에 설치되었던 조병사(造兵司)가 그 기원이다. 조병사는 이후 오사카 조병사, 대포 제조소, 포병 제2방면내 포병지청 등의 명칭 변경을 거쳐, 1879년 오사카 포병 공창이 되었다. 그 후 오사카 포병 공창이 육군조병창으로 통합되었고, 1923년 4월 1일 이후 육군조병창 오사카 공창이란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중일전쟁의 확대와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1940년 4월 1일 육군 병기 본부에 통합되었다가 1942년 10월 15일부터 육군 병기 행전본부에 통합되었다. 그 사이 명칭이 오사카 조병창으로 바뀌었으며 이 명칭으로 패전을 맞이했다.
오사카 포병 공창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우선 청일전쟁 시기에는 전쟁에 필요한 병기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노동자와 기계의 수를 늘려갔으며, 러일전쟁 시기에는 야포 개량을 위해 오사카 포병 공창의 직공 8명이 전장에 투입되기도 했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는 '병기의 독립'이라는 기치 아래 구경이 큰 화포의 제조와 수리에 전념하게 되었고, 자동차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주요 도시와 군사시설에 부설되는 수도관을 제작하는 등 기술력과 생산력을 증대시켜 가며, '동양 최대의 군수 공장'으로 성장해 나갔다.
화포와 탄약을 주로 생산하던 오사카 조병창(오사카 포병 공창)은 60회에 가까운 연합군의 오사카 공습에도 불구하고 패전을 하루 앞둔 8월 14일까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결국 이날 이루어진 마지막 대규모 공습(교바시 공습[京橋空襲])을 받아 3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1945년 8월 15일 기준으로 오사카 조병창의 전체 노무자 수는 63,000명이었으며, 오사카 조병창이 공습당한 1945년 8월 14일에 1,319명의 조선인 징용자(반도징용공원)가 있었다. 다만 이 공습에 의한 조선인 피해자 수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1,319명은 어디까지나 위의 날짜를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전 시기에 걸쳐 몇 명의 조선인이 동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추후의 과제로 남아 있다.
2015년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朝鮮人强制連行真相調査団)이 수행한 청취 조사에 따르면, 조선인 노무자들은 강제적으로 오사카 조병창에 배속되었으며, 그곳에서도 감시와 구타를 받으며 생활했다. 또한 월급은 없었으며('용돈 정도'를 받았다는 증언자도 있음), '반도인(半島人)'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거나 공습에 떠는 등 불안한 생활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진
※ 출처: Google Map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유지아, 『2019년도 일제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 학술연구용역 보고서 오사카 지역 군수공장의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19.
- 大阪砲兵工廠慰霊祭世話人会 편, 『大阪砲兵工廠の八月十四日―歴史と大空襲』, 東方出版, 1997.
- 久保在久 편, 『大阪砲兵工廠資料集 上』, 日本經濟評論社,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