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아케노베 광산
개요
제목 | 아케노베 광산 | 국가 / 지역 | 일본 / 효고현 야부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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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효고현 야부시 오야초 (兵庫県養父市大屋町) | |||
강제동원 시설 | 광산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미쓰비시 광업(주) | 동원 방식 | 미상 |
현재 | 미쓰비시 머티리얼 | 피해 인원(추정) | 약 1,792명 |
설명
역사
아케노베 광산(明延鉱山)은 809년에 개광하여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大佛)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동을 헌상했다고 전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16세기 말)에는 '아케노베 은산', 에도시대(1603~1868년)에는 '아케노베 동산'으로 불렸다.
근대에 접어들어 1872년 아케노베 광산은 메이지 정부의 관영 광산이 되었으며, 1896년에는 미쓰비시 합자회사(三菱合資会社)의 경영하에 광물 탐사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1908년에는 이곳에서 버려진 암석에서 철망간중석에 포함된 텅스텐이 발견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도쿄제국대학에서의 현미경 조사로 석석(錫石)이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아케노베 광산은 일본 굴지의 주석 광산으로 발전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아케노베 광산에는 1939년 12월부터 조선인이 강제로 동원되기 시작했다. 1939년 12월부터 1941년 2월까지 373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더해, 일본 후생성의 명부에는 1942년 11월부터 1945년 2월까지 총 899명이 연행된 것으로 나와 있으며, 중앙협화회(中央協和会)가 1942년에 작성한 「이입 조선인 노무자 상황 조사(移入朝鮮人労務者状況調)」에는 1942년 6월까지 520명이 연행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상을 합치면 1,792명의 조선인이 아케노베 광산으로 강제연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케노베 광산에 연행된 조선인 증언자로는 백제인(白褆寅) 씨의 증언이 있다. 그는 창원 출신으로 사촌 형과 함께 아케노베 광산에 연행되었다. 함바(飯場)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식사로는 콩 찌꺼기가 섞인 현미가 제공되었다. 갱에는 인솔자의 감시를 받으며 들어갔으며, 도망자는 본보기로 목도로 마구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광산협회가 편찬한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半島人勞務者ニ關スル調査報告)』에는, 아케노베 광산의 조선인 노무자에 관해 '기계 조작 능력이 없어서 능률이 오르지 않고, 위생 관념이 없으므로 갱 내부 정화에는 상당한 고심을 요하며, 또한 부화뇌동 성향이 강한 반면, 공동 작업에 대한 협조는 기대하기 어렵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애초에 강제로 연행된 데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 놓인 상황에서, 일본인과 같은 작업 능률을 기대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아케노베 광산은 야부시에서 갱도 견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야부시 홈페이지에서는 조선인 강제 노동자에 대해 일절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진
※ 출처: Google Map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竹内康人, 『調査・朝鮮人強制労働②財閥・鉱山編』, 社会評論社, 2014.
- 日本鑛山協會 편, 『日本鑛山協會資料 第78輯 半島人勞務者ニ關スル調査報告』, 日本鑛山協會, 1940.
- 養父市ホームページ https://www.city.yabu.hyogo.jp/soshiki/kyoikuiinkai/shakaikyoiku/3/74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