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오타니 광산, 와치 광산
개요
제목 | 오타니 광산, 와치 광산 | 국가 / 지역 | 일본 / 교토부 가메오카시 | |
---|---|---|---|---|
현주소 | 교토부 가메오카시 히에다노초 로쿠야 오타와 등 京都府亀岡市稗田野町鹿谷大タワ 등 | |||
강제동원 시설 | 광산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아와무라 광업소 | 동원 방식 | 모집 |
현재 | 일본신금속주식회사 | 피해 인원(추정) | 약 96명 |
설명
역사
오타니(大谷) 광산과 와치(和知) 광산은 아와무라 광업소(栗村鉱業所)가 텅스텐을 채굴하기 위해 운영한 광산이며, 각각 교토부의 가메오카시(亀岡市)와 교탄바초(京丹波町)에 위치하고 있다.
아와무라 광업소를 창업한 아와무라 도시아키(粟村敏顕)가 1909년에 일본에서 최초로 텅스텐을 발견했다. 아와무라 광업소는 1963년에 미쓰비시 금속 광업(三菱金属鉱業)과 합병하여 일본신금속주식회사(日本新金属株式会社)가 되었고, 텅스텐 가루, 몰리브덴 가루, 탄화칼슘 가루, 실리카 가루, 붕소화물 가루 등을 생산하고 있다.
아와무라 광업소가 운영했던 오타니 광산은 1914년에 채굴이 시작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으며, 1983년에 폐광했다. 와치 광산은 1941년부터 텅스텐, 주석, 망간 등이 채굴되었고 1945년에 폐광되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교토 지역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수와 강제동원 실태 등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문헌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4,873명이며, 1945년 6월 1일 현재 4,192명이 남아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아와무라 광업소가 운영하고 있었던 오타니 광산과 와치 광산에는 각각 47명, 49명이 동원되었으며, 1945년 6월 1일 현재 각각 47명, 48명이 남아 있었다. 아와무라 광업소는 이들 이외에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오타니 광산으로 100명을 더 동원할 계획이었다.
오타니 광산과 와치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텅스텐을 채굴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당시 와치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일본인의 증언이 있다. 이 일본인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와치 광산에 취직했는데, 이때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모습을 “광산의 건물도 완성되어 가고, 그 모습이 갖추어지면서, 산속에 있는 큰 기숙사가 완성되자, 조선에서 징용공이라고 말하는 갱내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50명 정도가 같은 조선인 우두머리를 따라왔습니다. ···(중략)··· 이 사람들은 산속 기숙사에 머물렀고, 작업 중 이외에는 한 발도 광산 구역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마치 노예와 같았고, 갱내 작업은 짚으로 만든 비옷이나 종이를 압축해 만든 비옷과 같은 모자를 쓰고, ···(중략)··· 머리부터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하얗게 되어 작업을 했고, 분진으로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중략)··· 이러한 작업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있어 탈주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이와 같이 와치 광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생활은 가혹했으며, 이는 비단 와치 광산뿐만 아니라 오타니 광산을 비롯하여 일본 각지의 광산으로 동원된 조선인들의 실태를 가늠하게 해 준다.
사진
※ 출처: Google Map
※ 출처: Google Map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淺田朋子, 「京都府協和會小史-戰前, 戰中の在日朝鮮人政策」,『在日朝鮮人史硏究』27號, 1997.
- 京都府,「新居前知事·三好知事事務引継演説甚」, 1945年 6月.
- 在日朝鮮人史硏究會, 『在日朝鮮人史硏究』 1980年6月號資料編.
- 田中はるみ, 「京都の空襲・学徒動員・工場疎開」, 『史泉』 81, 関西大学史学・地理学会, 1995
- 畑中光好, 「懐かしい思い出」, 思い出を綴る会, 『私たちの大東亜戦争』, 1985年
- 宮本弘道・下村仁作「京都府和知鑛山重石鑛床調査報告」, 工業技術院地質調査所,『地質調査 所月報』第3券第10号, 1952.
- 日本新金属株式会社ホームページ http://www.jnm.co.jp/ja/
- 廃墟検索地図 https://haikyo.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