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사도 광산
개요
제목 | 사도 광산 | 국가 / 지역 | 일본 / 니가타현 사도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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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니가타현 사도시 아이카와 소토쿠마치 1-1 (新潟県 佐渡市 相川 宗徳町 1-1) | |||
강제동원 시설 | 광산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 (三菱工業株式会社) | 동원 방식 | 모집, 관알선, 징용 |
현재 | 골든 사도(ゴールデン佐渡) | 피해 인원(추정) | 약 1,200명 |
설명
역사
사도 광산(佐渡鑛山)은 오키나와(沖縄)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섬인 니가타현(新潟県) 사도섬(佐渡島)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인들이 노무자로 강제동원된 니가타현 내 74개소 작업장 중 하나이며, 한국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제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강제 동원 피해 시설이다.
사도 광산은 에도시대(江戸時代) 직전인 1601년부터 본격적인 채굴이 시작되었다. 에도 막부가 사도 광산을 개발·관리했으며, 1615년부터 1694년까지는 금과 은이 다량으로 채굴되어 일본에서 유명한 금 광산·은 광산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접어들자 사도 광산은 메이지 정부 소유가 되었고, 메이지 정부는 영국의 광산 관련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근대적인 광산 기술을 배우면서 사도 광산의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이후 1896년에 미쓰비시(三菱) 합자회사가, 1918년에는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가 사도 광산을 차례로 인수하면서 채굴 활동을 이어갔고 1989년 3월에 자원이 고갈되어 조업이 중지되었다. 현재는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자회사인 골든 사도(ゴールデン佐渡)가 운영하고 있다.
한편 사도 광산에 포함된 갱도 터, 채굴 시설, 제련 시설 등이 중요문화재, 사적, 근대화 산업 유산으로 지정되어있으며, 2024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관련 홍보물은 에도 시대부터 폐광이 되는 시기까지 사도 광산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주로 다루고 있지만,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된 내용은 없다. 또한 기타자와 지구(北沢地区)에 위치한 아이카와 향토 박물관(相川郷土博物館)에서 사도 광산에서 노역한 조선인들을 설명하는 코너를 만들었지만, 강제 동원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은 채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관련 판넬들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 이전에 이미 조선인들이 사도 광산에서 노동하고 있었다. 1902년에서 1929년 사이 경상남도 8명,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각각 2명, 전라북도 1명, 미상 1명 등 총 21명의 조선인이 사도 광산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다. 이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들이 사도 광산으로 강제동원되면서 그 수가 증가한다.
사도 광산은 할당 모집을 통해 1940년에 3회(2월 98명, 5월 248명, 12월 300명), 1941년 2회(6월 153명, 10월 127명), 1942년 1회(3월 79명) 등 총 여섯 번에 걸쳐 1,005명의 조선인을 동원했다. 논산, 부여, 공주, 연기, 청양 등 충청남도 지역 출신 조선인들이 2년에서 3년간 광부로서 동원되었고, 1943년 6월 기준으로 조선인 광부의 수는 584명이었다. 이후 조선인들의 동원은 이어졌으나 정확한 인원수와 동원 횟수는 알 수가 없으며,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북도, 함경남도 등 여섯 개 지역의 조선인들이 사도 광산으로 동원되었다. 1945년 7월 당시 1,200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사도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대부분 착암부(鑿巖夫), 지주부(支柱夫), 운반부, 정지부(整地夫), 제광부(製鑛夫) 등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거나 위험한 일들을 주로 담당했다. 노동시간은 1일 3교대(1회: 6시~15시, 2회: 14시~23시, 3회: 23시~다음날 6시)였고, 1944년 8월부터 증산을 위해 노동시간이 늘어났다.
사도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임금은 월평균 1943년 4월에 83엔 88전, 5월에 80엔 56전이었으며, 이와 같은 임금이 그대로 지급되었는지는 의문시되고 있다. 임금을 비롯한 노무자들의 처우와 임금 지급 방식 등은 고용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청부제로 인해 임금의 일부가 제외되었고, 광산 노동에 필요한 도구 비용, 후생연금보험 등이 공제되었기 때문에 실수령액은 적었을 것이다. 한편 사도 광산 측은 조선인들에게 강제저축을 시켰다. 이와 관련한 공탁 기록에 따르면 사도 광산에서 일했던 조선인 1,140명의 공탁 금액은 231,059엔 59전인데, 해당 기록에는 개인 정보가 없어서 누가 얼마를 받아야 했는지도 알 수가 없으며, 1959년 5월 11일에 이 공탁금은 일본 정부에 귀속되었다.
사도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다른 지역으로 전근되는 일도 있었다. 해당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인근의 다카치(高千) 광산으로 전근되기도 하고 1945년 8월에는 408명의 조선인이 사이타마현(埼玉県)과 후쿠시마현(福島県)으로 전근되어 지하 공장 건설 현장 등에 투입되기도 했다.
사도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시모야마노카미마치(下山之神町)의 야마노가미(山之神) 사택, 신고로마치(新五郞町)의 제1 상애료, 스와초(諏訪町)의 제3 상애료, 지스케마치(治助町)의 제4 상애료와 금강료 등 네 개의 숙소에서 생활했다. 1943년 5월 기준으로 야마노가미에 117명, 제1 상애료 185명, 제3 상애료 157명, 제4 상애료 124명, 기타 1명 등 당시 584명의 조선인이 각 숙소에서 살고 있었다.
사도 광산에서 차별 대우 등에 대해 저항하는 조선인들도 있었다. 1940년 4월 11일에 모집 당시 조건과 실제 받은 임금의 차이에 대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조선인 97명이 파업을 일으켰다. 급여 외 식비 등의 공제, 작업 도구 등의 본인 부담, 노무 관리자들의 차별의식, 모집 당시의 불명확한 근무 조건 등이 그 이유였다. 1942년 4월 29일에는 조선인 노무자 3명이 연행된 일에 대해 160명의 조선인이 사무소에 난입해 항의한 일도 발생했다. 이 외에도 임금이나 식료품 부족에 불만을 품고 사도 광산에서 탈출하는 일들도 발생한 일도 있었다.
사진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Google Map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정혜경, 앞의 자료, pp.95~96.
※ 출처: 필자 촬영
참고문헌
- 김인덕, 『노무동원 경로 연구: 국민징용, 할당모집, 관알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0.
- 민족문제연구소·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사도 광산과 조선인 강제노동』, 2023.
- 정혜경, 『일본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미쓰비시(三菱)광업(주) 사도(佐渡)광산을 중심으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19.
- 허광무 외, 『일제강제동원 Q&A(1)』, 도서출판 선인, 2015.
- 相川町史編纂委員會, 『佐渡相川の歷史-通史編, 近現代』, 1995.
- 新潟県観光文化スポーツ部文化課世界遺産登録推進室,「「佐渡島の金山」世界遺産先取りガイドブック」
- -----, 「「佐渡島の金山」リーフレット」
- 広瀬貞三, 「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者(1939~1945)」, 『新潟国際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第3号, 2000.
- 佐渡島の金山ホームページ https://www.sado-goldmine.jp/
- 史跡 佐渡金山ホームページ https://www.sado-kinz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