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개요
제목 |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 국가 / 지역 | 일본 / 나고야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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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아이치현 나고야시 미나토구 오에초 10번지 등(愛知県名古屋市港区大江町10番地 등) | |||
강제동원 시설 | 비행기 공장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미쓰비시 중공업 | 동원 방식 | 관알선 |
현재 | 미쓰비시 중공업 | 피해 인원(추정) | 약 960명 |
설명
역사
㈜ 미쓰비시 중공업은 나카지마(中島) 비행기, 가와사키(川崎) 항공기와 함께 당시 일본에서 항공기를 생산하는 주요 업체 중 하나였다. 1920년에 나고야시(名古屋市)에 본사를 둔 ‘미쓰비시 내연기 제조 주식회사’(三菱内燃機株式会社)로 출발하여 1921년에 ‘미쓰비시 내연기 주식회사’(三菱内燃機株式会社), 1928년에 ‘미쓰비시 항공기 주식회사’(三菱航空機株式会社)로 사명을 변경했다. 1920년대에는 해군 항공기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지정되었고, 해군과 육군에서 사용하는 항공기 약 100기를 생산했다.
만주사변(1931년)을 계기로 육군과 해군의 항공기 생산량이 증가했고, 1934년에 ‘미쓰비시 선박 주식회사’(三菱造船株式会社)와 합병되어 ‘미쓰비시 중공업 주식회사’가 되었다. 미쓰비시 중공업 주식회사의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확대로 육군과 해군의 항공기 수요가 더욱 증가하면서, 1941년에 닛신(日淸) 방적 나고야 공장을 매입하여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도토쿠(道德) 공장’으로 사용하는 등 1940년과 1941년에 공장을 신설하거나 기존 공장을 확장하는 형태로 항공기 생산을 확대했다. 당시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는 육군과 해군의 전투용 항공기를 전담하여 생산하는 군수 업체로 크게 성장했다.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는 1944년 12월에는 연면적 2만 평, 공작 기계 3,800대를 보유한 대규모 공장이었으나 1944년 12월 초에 발생한 도난카이 대지진(東南海大地震)과 중순의 미군 공습으로 인해 공장이 파괴되면서 1945년 2월에 도야마현(富山縣), 가나자와시(金澤市) 등으로 생산지를 분산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재벌 해체 등 연합군이 실시한 경제민주화 조치로 인해 1950년에 미쓰비시 중공업은 3개의 회사로 해체되었다가 1964년에 다시 합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전쟁 수행을 위한 전시동원체제 강화로 인해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는 1944년 5월에 조선여자근로정신대를 모집했다. 전라남도와 충청남도 지역에서 모집된 300여 명은 나고야에 위치한 오에(大江) 공장과 도토쿠 공장에 동원되었다.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가 생산 시설 일부를 도야마현과 가나자와시의 제11 제작소로 이전하면 조선여자근로정신대도 함께 이동하게 되는데, 피해자들은 이미즈시(射水市)에 위치한 다이몬(大門) 공장과 난토시(南礪市)에 위치한 후쿠노(福野) 공장으로 배치되었다. <미군전략폭격조사단보고서 제16권 「三菱重工業會社」의 고용분류표>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 현재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배치된 272명 중 전라남도 출신 135명은 다이몬 공장으로, 충청남도 출신 137명은 후쿠노(福野) 공장으로 배치되었고,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이외에 377명의 조선인 남성 징용자가 다이몬 공장에, 4명이 이나미(井波) 공장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 자료 중 <고용분류표 (1945.2~8)>에서는 1945년 2월부터 8월까지 공장별로 구별이 없이 1945년 2월부터 5월까지 395명, 6월 668명, 7월 662명, 8월 656명의 조선인 남성 징용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에 공장과 도토쿠 공장에 동원된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30~50명의 소대와 2개 이상의 소대로 구성된 중대로 조직되었다. 충청남도 출신 2중대, 전라남도 출신 1중대가 있었고, 각각 한 동의 기숙사에 배치되었으며, 6명~8명이 4평 정도의 방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피해자들은 공장에서 일하기 전에 한 달 동안 훈련을 받고 공장에 배치되어 10시간씩 주 6일 근무를 했다. 충청남도 출신의 피해자들은 주로 양철을 가위로 오려내는 작업, 기계를 발로 눌러 쇠를 찍어내는 작업, 비행기 날개에 끈을 묶거나 광목을 붙이는 작업 등을 담당했고, 전라남도 출신의 피해자들은 부품 도본을 그리는 작업, 부품을 매끄럽게 가는 작업, 비행기 부품과 몸체에 페인트칠하는 작업 등을 담당했다. 14세에서 16세였던 피해자들은 일하는 과정에서 손발에 부상을 입거나 페인트로 인해 눈에 부상을 입는 등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선반 기계를 다루다가 손가락 4개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임금에 대해서는 피해자들에 따르면 대부분 임금을 받지 못했다거나 30엔의 월급을 현금으로 받아 일부를 집에 보냈다거나 임금이 아닌 용돈처럼 약간의 돈을 받았다는 증언이 있다.
1944년 12월에 있었던 지진과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12월 초 규모 7.9에 달하는 도난카이 지진이 발생하면서 오에 공장과 도토쿠 공장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도토쿠 공장이 무너지면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6명, 일본인 노동자 57명이 사망하기도 했으며, 건물에서 뛰어나오다가 머리, 손, 다리 등에 부상을 입는 경우도 많았다. 같은 해 12월 중순에는 미군의 나고야 공습이 이루어졌는데, 방공호로 대피하다가 소이탄의 파편에 맞아 사망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도 있었다.
일본의 시민단체 ‘도난카이 지진 구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도토쿠 공장 희생자 조사 추도 실행위원회’(東南海地震 舊三菱名航 道德工場犧牲者調査追悼實行委員會)는 도토쿠 공장 자리에 지진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1988년 12월 7일 ‘지진 희생자 추도 기념비’를 세웠다. 이 추도비에는 지진으로 사망한 일본인 희생자와 함께 6명의 조선여자근로정신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에 공장 자리에도 1952년에 만들어진 ‘미쓰비시 중공업 순직비’가 세워져 있는데, 처음에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사망자는 적혀있지 않았다. 나고야 시민운동가들의 활동을 통해 1988년 12월에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사망자 6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한편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관련 피해자들은 1992년부터 소송을 제기해 왔다. 1992년에 야마구치(山口) 지방재판소에 처음으로 소송을 제기했고, 2003년에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기각 판결이 나왔다. 피해자들은 2012년에 광주지방법원에 다시 소송을 제기했고, 2015년에 광주고등법원의 원고 일부 승소 판결, 그리고 2018년에는 미쓰비시 중공업이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대법원의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판결 이후 미쓰비시 중공업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2019년에 피해자들은 미쓰비시 중공업이 소유한 상표권과 특허권 등의 국내 자산 압류에 대한 압류를 신청했고, 대전지방법원은 이에 대한 매각 명령을 내렸다. 이후 2023년 3월 6일 한국 정부는 ‘강제징용 대법원판결 관련 정부 입장’을 통해 2018년에 내려진 대법원의 판결 관련 피해자들에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판결금과 지연 이자를 지급한다는 ‘제삼자 대위변제’를 발표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이와 같은 방식을 거부하고 있다.
사진
※ 출처: 김미현,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008 (이하, 『조선여자근로정대 노무동원 조사』), p.91.
※ 출처: 『조선여자근로정대 노무동원 조사』, p.97.
※ 출처: 『조선여자근로정대 노무동원 조사』, p.98.
※ 출처: 『조선여자근로정대 노무동원 조사』, p.101.
※ 출처: 『조선여자근로정대 노무동원 조사』, p.101.
참고문헌
- 김광열, 『태평양전쟁기 일본의 군수동원법 및 군수회사지정제도와 조선인 강제동원–일본과 조선에서의 제도 운용을 중심으로-』, 2020.
- 김미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 2008.
- 松本文雄, 司令部偵察機と富山, 桂書房, 2006.
- 三菱重工ホームページ https://www.mhi.com/jp
- 뉴시스
- 법률신문
- 서울신문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