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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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노사와 광산

개요

미네노사와 광산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 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미네노사와 광산 국가 / 지역 일본 /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현주소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덴류쿠 (静岡県浜松市天竜区)
강제동원 시설 광산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구하라 광업(주), 일본광업(주) 동원 방식 징용, 관알선, 모집
현재 ENEOS 홀딩스(주) 피해 인원(추정) 약 496명

설명

역사

미네노사와 광산(峰之沢鉱山)은 17세기 무렵부터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광산 부근에 있던 '금산지장(金山地藏)'은 광산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금 광산으로 개발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888년 미네노사와 광산으로 명명된 뒤, 1907년에는 히타치 광산(日立鉱山)을 개발하고 있던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介)가 매입했다. 1912년 미네노사와 광산에서는 614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고, 동철광 등을 매년 22,974톤 정도 생산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불황과 광산에서 일어난 화재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휴산했지만, 1934년부터 다시 채광을 재개하여 1938년부터는 일본광업(日本鉱業)이 직접 운영했다. 1942년에는 선광장(選鑛場)이 완성되었으며, 이때부터 월 5,000톤의 광물 처리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지하자원 증산 정책하에 월 9,000톤의 처리까지 계획되었다. 1944년 10월에는 광산발전 축하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이 미네노사와 광산으로 강제연행되었던 것이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미네노사와 광산에는 1938년부터 1945년 1월까지 모두 496명의 조선인이 강제로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 동원 방식은 모집, 관알선, 징용으로 이루어졌는데, 우선 1942년 6월까지 180명이 모집 형태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충청남도 홍성군, 경기도 수원군, 시흥군, 경상남도 고성군 등에서 연행된 인원이었다. 그리고 1943년부터 1944년까지 관알선으로 충청북도 청주군, 충청남도 홍성군, 전라남도 해남군, 단양군, 장성군에서 여섯 차례에 설쳐 201명이 연행되었다. 1944년 11월과 1945년 1월에는 징용으로 충청북도 청주군, 괴산군에서 90명이 연행되었다. 이외에도 연고모집(緣故募集) 형태로 1938년부터 1944년까지 25명이 연행되었다.

미네노사와 광산의 조선인들은 쟁의와 도망으로 저항했다. 1941년 10월에는 20여 명이 식사에 대한 불만으로 식사 담당자(조선인 부부)를 구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경찰은 7명을 검거하여 본적지로 송환했다. 1943년 9월에는 '국민동원계획'으로 연행된 조선인 중 39명이 '훈련'을 받는 동안 음주를 엄금하는 규율을 지키지 않았다며 이들을 질책한 함바(飯場) 주인 부부를 구타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리고 미네노사와에 강제동원된 496명의 조선인의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240명이 2년 만기를 채우기 전에 도주했다. 연행되어 온 곳에서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선인들이 직접 행동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강제연행에 의한 증산 태세의 확보를 노렸던 일본 정부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진

미네노사와 광산 위치 area_map_64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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