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구네 광산
개요
제목 | 구네 광산 | 국가 / 지역 | 일본 /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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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 덴류쿠 (静岡県浜松市天竜区) | |||
강제동원 시설 | 광산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후루카와 광업(주) | 동원 방식 | 모집, 관알선, 징용 |
현재 | 후루카와 기계금속(주) | 피해 인원(추정) | 약 499명 |
설명
역사
구네 광산(久根鉱山)은 1731년에 가타와세 광산(片和瀬鉱山)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발되어, 19세기 후반까지 사쿠마 광산(佐久間鉱山), 하라구네 광산(原久根鉱山)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897년에는 광맥이 발견되어 연간 60톤에 이르는 광석이 산출되었지만, 이 광산 개발은 주변에 광독(鑛毒) 오염을 일으켰다. 이에 지역 주민들은 광독 오염 반대운동을 벌이였고, 1898년 정부로부터 채광 및 제련을 정지당했다.
그리고 1899년 이 광산을 매수한 사람이 후루카와 광업의 창업주 후루카와 이치베에(古河市兵衛)였다. 후루카와 자본으로 1905년 처음 통동갱(通洞坑)이 완성되었으며, 1917년에는 삭암기(削岩機)가 도입되었다. 구네 광산은 후루카와 광업에 있어서 아시오 동산(足尾銅山) 다음 가는 출산량을 자랑하는 광산으로 성장했다.
1930년대 후반, 동 생산 증대가 요구되는 가운데, 구네 광산 남부의 나코오 지산(名合支山)에서 채굴도 시작되었으며, 구네 광산에서는 새로운 광맥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증산 태세 하에, 직장의 전장화, 수용소화가 진행되었다. '산동보국(産銅報國)'이라는 표어 아래에 1944년에는 대증산운동(大增産運動)과 결전개근운동(決戰皆勤運動)이 조직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혹사를 당한 것이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구네 광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1940년 8월부터 1945년 6월까지 모두 499명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동원 방식은 모집, 관알선, 징용으로 이루어졌는데, 먼저 1940년 8월부터 1942년 5월까지 모집과 연고모집(緣故募集) 형태로 연행이 이루어졌다. 지역으로 보면 경상남도 상주군과 충청남도 청양군을 중심으로 총 140명이 연행되었다. 다음으로 1942년 11월부터 1944년 5월까지는 관알선에 의한 연행이 이루어졌다. 주로 충청남도 예산군, 서천군, 경삼북도 청송군, 전라남도 나주군에서 네 차례에 걸쳐 181명이 연행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모치코시 광산(持越鉱山, 현 시즈오카현 이즈시)에서 11명이 전송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1944년 11월부터 1945년 5월까지는 징용으로 조선인 노동자가 연행되었다. 충청남도 서산군, 천안군, 강원도 정선군 등에서 세 차례에 걸쳐 137명이 연행되었으며, 1945년 6월에는 인근 미네노사와 광산(峰之沢鉱山)에서 30명이 추가로 이입되기도 했다. 다른 곳에서 이입된 인원수를 제외하면 총 458명이 조선에서 직접 연행된 것이다.
현재 구네 광산의 자료를 보관하던 창고는 호우 피해를 당해 관련 자료가 흩어졌고, 갱구에서는 여전히 광독수(鑛毒水)가 흐르고 있으며, 2023년 10월 현재 관련 지자체의 홈페이지에도 구네 광산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자료의 발굴을 통해 구네 광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실태에 관한 추가 연구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사진
참고문헌
- 竹内康人, 『調査・朝鮮人強制労働②財閥・鉱山編』, 社会評論社,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