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사가미 육군조병창
개요
제목 | 사가미 육군조병창 | 국가 / 지역 | 일본 / 가나가와현 고자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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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 주오쿠 야베신덴 (神奈川縣相模原市中央区矢部新田) | |||
강제동원 시설 | 육군 시설 | 피해 유형 | 군무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육군 | 동원 방식 | 징용 |
현재 | 육상 자위대 | 피해 인원(추정) | 약 529명 |
설명
역사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고자군(高座郡)에 위치한 사가미 육군조병창(相模陸軍造兵廠)은 1938년 8월 병기제조소(兵器製造所)로 개설되었다. 1940년 기존의 관리 기관이었던 육군조병창이 육군병기창과 함께 육군병기행정본부(陸軍兵器行政本部)로 통합되면서 육군조병창으로 승격되었다. 1938년 개설 당시 거대한 부지를 비롯한 지하 공장 시설 등 당시 최신의 군수 공장으로서 동양 제1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해당 시설은 전차의 제조를 담당한 제1 제조소와 중구경 포탄의 제조를 담당한 제2 제조소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제조소마다 고유의 업무를 지닌 '공장'들이 있었다고 하나, 정확한 구성과 작업 내용은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제1 제조소의 제1 공장은 1944년 말경에 견인차의 엔진을 제작했다는 사실과 제5 공장이 주물공장이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종업원의 규모는 1943년 말경에는 약 12,300명을 헤아렸고, 1944년 7월 '결전 비상시 조치 요강에 근거한 학도 동원 실시 요강(決戰非常時措置要綱に基づく學徒動員實施要綱)'의 시행으로 학도근로동원이 실시된 후에는 공원(公員)의 80%가 징용공, 소년소녀양성공, 여자정신대, 동원학도 등으로 구성되었다. 1945년 패전 당시 전체 공원의 규모는 30,000여 명에 이르렀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사가미 육군조병창의 조선인 동원 실태는 해당 시설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명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심재욱의 분석에 의하면 총 552명의 조선인이 확인되는데, 그 동원 시기는 한 명(1939년 8월 23일 동원)을 제외하면 모두 1944년 4월부터 1945년 6월 사이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1944년 11월 18일의 222명(79.86%)과 12월 9일의 48명(17.27%), 1945년 3월 6일의 267명(97.8%) 등 특정 시기에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출신 지역은 1944년은 충북 지역, 1945년은 경북 지역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인다. 즉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동원이 이루어지는 '지역집단동원'의 양상을 띠고 있다. 연령은 20대 후반(212명)과 20대 중반(322명)이 전체의 96.73%를 차지했다.
위 명부의 상단에는 징용을 의미하는 '徵'자가 수기 또는 도장 등의 형태로 기재되었는데, 552명 중 529명(95.8%)의 명표에서 '徵' 자가 확인된다. 즉 이들이 징용공원(徵用公員) 즉 '응징사(應徵士)'로 동원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은 1943년 9월 국민징용령 3차 개정을 통해 조선에서의 동원을 보다 확대 및 강화했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1944년 2월 8일 '응징사복무규율(應徵士服務規律)'을 조선에도 제정 및 공포했다. 따라서 1944년 11월과 12월, 1945년 3월에 동원된 이들은 대부분 '응징사'로서 동원되었다고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총 540명이 '보통공(普通工)'이라는 직급으로 다양한 직종에서 여러 작업에 투입되었으며, 최하 0.59엔에서 최고 2.94엔까지 일급(日給)이 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각종 명목으로 공제가 이루어졌을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에 산정된 임금과 실제 지급된 임금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심재욱, 「일본 정부 인계 자료를 통해 본 戰時體制期 陸軍造兵廠의 朝鮮人 軍屬動員―『公員名票』 분석을 중심으로」, 정혜경, 심재욱, 오일환, 김명환, 기타하라 미치코, 김난영 저, 『강제동원을 말한다―명부편(1) 이름만 남은 절규』, 선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