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히타치 광산
개요
제목 | 히타치 광산 | 국가 / 지역 | 일본 / 이바라키현 히타치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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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이바라키현 히타치시 미야타초 (茨城県日立市宮田町) | |||
강제동원 시설 | 광산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구하라 광업(주) | 동원 방식 | 모집, 관알선, 징용 |
현재 | ENEOS 홀딩스(주) | 피해 인원(추정) | 약 4,200명 이상 |
설명
역사
히타치(日立)의 광산 개발은 16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에도시대와 메이지기를 거쳐 아카사와 광산(赤澤鑛山)으로 불렸던 이 광산을 1905년 말에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가 매입했고, 1906년부터 히타치 광산(日立鑛山)이라는 이름으로 채굴이 시작되었다. 1908년에는 광산 근처에 다이오인제련소(大雄院製錬所)가 생겼고, 1909년의 채굴조광량(採掘粗鑛量)은 전국 4위를 기록했다. 이와 같은 경영 확대 속에 1912년에는 구하라 광업(久原鑛業)이 설립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광물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구하라는 일본 내 22곳을 포함해 조선과 중국의 광산을 매입했으며, 1916년에는 조선의 진남포(鎭南浦)에 대형 제련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영 확대와 증산 속에서 구하라의 동 생산량은 1917년 일본 1위에 달했고, 1918년에는 전국 금 생산의 40%, 은 생산의 50%, 동 생산의 30%를 점하며 독점 자본으로 성장했다.
1912년 7월 신문 기사에는 이타치 광산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다퉜다는 기록이 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인 갱부가 탈주했다는 기사도 있다. 1910년 전반부터 조선인 노동자가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중앙협화회(中央協和会)가 1942년에 작성한 「이입 조선인 노무자 상황 조사(移入朝鮮人労務者状況調)」에 따르면, 1942년 6월까지 1,906명의 조선인이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자료에 따르면, 1939년도에 650명, 1940년도에 550명, 1941년도에 800명, 총 2,000명의 조선인 연행을 일본 정부가 승인하고 있었다. 이러한 승인하에 1942년 6월까지 1,906명이 조선인이 연행된 것이다. 또한 후생성 근로국(厚生省勤労局)의 명부에서 집단적 연행이 기재된 것은 1942년 8월 이후부터 2,340명 정도이다. 이를 위의 1,906명과 더하면 히타치 광산에는 총 4,2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연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확한 숫자는 파악할 수 없으나, 아사히 광산(旭日鑛山), 가와즈 광산(河津鑛山), 오타니 광산(大谷鑛山), 다카타마 광산(高玉鑛山), 다카노미네 광산(鷹峰鑛山) 등에서 이입된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도 있었다.
조선인 강제 연행은 모집, 관알선, 징용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히타치 광산으로 연행된 조선인은 에도(江戶)나 아오바(靑葉) 등의 성과 이치로(一郞)나 지로(次郞)와 같은 이름이 지어졌다. 숙소는 감시원이 경비견을 데리고 24시간 순찰했다. 식사로는 보리, 옥수수, 콩 등이었으며, 갱도에는 주먹밥 두 개를 허리에 차고 들어갔다. 갱도 내부에서는 쉬려고 하면 감독관에게 구타당했다.
또한 연행된 조선인들은 경찰과 회사의 감시하에 놓였으며, 발견된 도망자는 구타당했다. 강제 노동과 조악한 식사, 자유의 억압 속에서 1941년 6월에는 50여 명의 조선인이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쟁의를 일으켰지만, 전원 검거되었으며, 1942년 11월에는 식사 문제를 계기로 집단 폭행 미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40명 정도의 조선인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사진
※ 출처: Google Map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竹内康人, 『調査・朝鮮人強制労働②財閥・鉱山編』, 社会評論社, 2014.
- 日本鑛山協會 편, 『日本鑛山協會資料 第78輯 半島人勞務者ニ關スル調査報告』, 日本鑛山協會, 1940.
- 日鉱記念館ホームページ https://www.jx-nmm.com/museum/
- 宮地英敏, 「中央協和会編『朝鮮人労務者募集状況』」, 『經濟學研究』77(1), 九州大学経済学会,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