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아시오 동산
개요
제목 | 아시오 동산 | 국가 / 지역 | 일본 / 도치기현 닛코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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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도치기현 닛코시 아시오지구 (栃木県日光市足尾地区) | |||
강제동원 시설 | 광산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후루카와 광업(주) | 동원 방식 | 모집, 관알선, 징용 |
현재 | 후루카와 기계금속(주) | 피해 인원(추정) | 약 2,416명 |
설명
역사
아시오 동산(足尾銅山)은 16세기 중엽부터 동이 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610년부터 에도 막부의 직영 동산이 되었다. 전근대 시기 아시오 동산의 최전성기는 17세기 중엽이었는데, 이때부터 연간 1,300톤 이상의 동을 산출했고, 1684년에는 1,500톤을 산출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산출된 동은 에도성을 비롯한 여러 건물의 동제 기와로 쓰였으며,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로 수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18세기 중엽부터 산출량이 감소하기 시작하여 막부 말기에는 폐광 상태가 되어 있었다.
1868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신정부가 아시오 동산을 소유했지만, 4년 뒤인 1872년 민간에 불하했다. 그 후 1877년 후루카와 광업(주)의 창업주 후루카와 이치베에(古河市兵衛)가 아시오 동산을 매입했고, 새로운 채굴 방식을 채용하면서 1884년 일본 최대의 동 생산량을 기록하는 등 1920년대 후반까지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1937년의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고, 1940년부터 1945년 사이 일본 정부의 '비상시증산운동(非常時增産運動)'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미 아시오 동산에는 커다란 광맥이 발견되지 않는 상태였으며, 무리한 비상시증산운동 하에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인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아시오 동산에는 1940년 8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총 2,416명이 강제로 동원어 31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된다. 강제동원은 1939년의 모집에서 1942년의 관알선을 거쳐, 1944년 9월 이후 징용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 중 370명은 1943년 4월 홋카이도의 고노마이 광산(鴻之舞鉱山)에서, 155명은 1943년 5월 홋카이도 지토세 광산(千歳鉱山)에서 전송된 것이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2015년의 군함도에 이어 2022년 9월 사도 광산을 '금을 중심으로 한 사도 광산 유사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사도 광산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시기를 에도시대인 1867년까지로 한정했다. 조선인 강제노동의 사실을 은폐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 문화청의 '세계유산 잠정 일람표 후보' 중 하나로 '아시오 동산–일본의 근대화·산업화와 공해 대책의 기점-'이 등록되어 있다. 앞으로 일본 정부가 아시오 동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과거의 군함도와 사도 광산처럼 의도적으로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은폐하려 하는 것이 아닌지 염려되는 바이다. 다만, 아시오 동산이 위치한 닛코시의 홈페이지에는 '전시 하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노동 인구가 조달되었으며, 갱의 내외에서 강제적으로 작업에 종사했습니다(戦時下の労働力不足を補う目的で、朝鮮半島からの労働人口の調達がなされ、坑内外での作業に従事させられました)'라고 명기하고 있음이 확인된다(2023년 10월 현재).
사진
※ 출처: Google Map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竹内康人, 『調査・朝鮮人強制労働②財閥・鉱山編』, 社会評論社, 2014.
- 日光市ホームページ https://www.city.nikko.lg.jp/bunkazai/ashiodouzannorekisi.html
-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