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에오로시 발전소
개요
제목 | 에오로시 발전소 | 국가 / 지역 | 일본 / 홋카이도 우에카미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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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홋카이도 히가시카와무라 가미카와군 노카난 (北海道上川郡東川町ノカナン) | |||
강제동원 시설 | 발전소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일본발송전력 | 동원 방식 | 모집, 징용 |
현재 | ㈜ 홋카이도 전력 | 피해 인원(추정) | 1,000명 이상 |
설명
역사
에오로시(江卸) 발전소는 1945년 8월에 홋카이도(北海道) 히가시카와무라(東川村) 가미추베쓰(上忠別)에 건설된 수력발전소이다.
일본 정부는 1939년에 전쟁 수행을 위해 전력을 확보할 목적으로 새로운 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에오로시 발전소였다. 이를 시공한 것은 일본발송전(日本發送電)이었는데, 1938년에 전력관리법(電力管理法)과 일본발송전주식회사법(日本発送電株式会社法)을 근거로 국가가 전력 사업을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출범한 기업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일본발송전을 통해 전기의 발전 및 송전을 통제했으며, 일본의 패전 후 일본발송전은 홋카이도 전력(北海道電力), 규슈 전력(九州電力), 시코쿠 전력(四国電力) 등 9개의 전력회사로 해체·재편되었다.
에오로시 발전소는 인근에 위치한 추베쓰강(忠別川)을 이용하여 약 150m 낙차를 통해 최대 18,600킬로와트의 전력을 생산하는 규모가 큰 수력발전소였다. 2002년에 노후한 발전소 관련 설비들을 폐지하고 2016년에 새로운 설비로 설치하여 재가동되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치르던 일본 정부는 일본발송전을 통해 전력 관련 사업을 관리·통제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발송전이 에오로시 발전소도 건설했는데, 여기에 조선인들도 강제동원되었다. 에오로시 발전소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수와 시기 등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구술 자료 등 관련 자료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 당시 노동력이 부족해진 일본 정부는 국가총동원법(1938년)과 국민징용령(1939년)을 통해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하게 된다. 홋카이도 지역에서도 1939년 11월에 2,000여 명의 조선인 노무자 모집이 허가되면서 이후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조선인들이 강제동원 된다. 조선인들은 철도, 발전소, 도로, 비행장, 군사시설 등의 대부분 토목공사와 관련한 곳에 동원되었다. 당시 토목공사는 정부가 대기업 등에 하청을 주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청업자 중 하나인 구미(組)는 공사장 주변에 노동자들의 숙박소인 함바(飯場)를 만들고 노무자들을 수용했다.
에오로시 발전소 건설 당시 일본발송전은 아라이구미(荒井組)와 아이자와구미(逢沢組)에 하청을 주었고, 두 구미를 중심으로 발전소 공사가 진행되었다. 에오로시 발전소에 조선인들이 처음으로 동원된 시기는 1940년경이며, 주로 터널 굴착 공사와 수도(水道) 건설에 동원되었다.
강제동원 피해자에 따르면 약 2,000명의 조선인이 노무자로 동원되었다. 피해자는『당사자가 쓴 강제연행, 홋카이도 어둠 속에 사라진 11명』(『當事者が書いた強制連行-北海道⋅闇に消えた十一人』)을 통해 당시 자신을 포함하여 부당한 처우에 대해 파업을 일으킨 조선인 노무자들, 이로 인한 형무소 수감, 피해자를 제외한 조선인 11명의 행방불명 등 에오로시 발전소에서 겪은 강제동원 상황을 전하고 있다. 당시 아라이구미와 아이자와구미는 다코베야(タコ部屋) 10개를 설치했고, 각 방에 각각 100여 명의 조선인이 속해 있었다. 다코베야는 노무자들이 거주하던 숙소로 소속 노무자들은 관리자인 오야카타(親方)의 감독하에 다코베야에서 감금 생활을 하면서 노역했다.
한편 홋카이도 전력의 자료에 따르면 에오로시 발전소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의 수는 아라이구미 약 300명, 아이자와구미 약 480명 등 약 78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과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에오로시 발전소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약 1,000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에오로시 발전소에서 노역하던 조선인들은 타코베야에서 거주하면서 타코(문어)로 불리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오야카타 등 일본인 관리자들의 폭력으로 인한 구타 등의 감시와 학대, 부족한 음식과 비위생적인 생활환경 등 죄수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노역을 감당해야 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조선인들은 노무계약 기간이 끝난 후 재계약을 거부하고 파업을 시행하거나, 독립운동을 계획하거나 도주하는 등 직간접적인 저항을 펼치기도 했다.
사진
가운데 세로로 기다란 모양이 새롭게 설치된 발전소 관련 설비
※ 참조: Google Map
※ 참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아홉머리 넘어 북해도로 –홋카이도 강제 피해 구술 자료집』, 2009, p.386.
※ 참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아홉머리 넘어 북해도로 –홋카이도 강제 피해 구술 자료집』, 2009, p.386.
※ 참조: Google Map
참고문헌
- 김인덕, 『노무동원 경로 연구: 국민징용, 할당모집, 관알선』, 2020.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아홉머리 넘어 북해도로–홋카이도 강제 피해 구술 자료집』, 2009.
- 하승현, 『홋카이도 히가시카와초 에오로시발전소 강제동원피해 진상조사』,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1.
- 朝鮮人强制連行実態調査報告書編集委員會·札幌学院大学北海道委託調査報告書編集室, 北海道と朝鮮人労働者-朝鮮人强制連行実態調査報告書-, <北海道の戦時下労働関係年表>, 19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