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아사지노 비행장
개요
제목 | 아사지노 비행장 | 국가 / 지역 | 일본 / 홋카이도 소야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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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홋카이도 소야군 사루후쓰무라 아사치노다이치 北海道宗谷郡猿払村浅茅野臺地 | |||
강제동원 시설 | 비행장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미상 | 동원 방식 | 미상 |
현재 | 미상 | 피해 인원(추정) | 약 300명 |
설명
역사
아사지노(淺茅野) 비행장은 라페루즈 해협(La Perouse Strait,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의 해협) 방위와 대미 작전 수행을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홋카이도 사루후쓰무라(猿拂村)의 남쪽 아사지노 지구(淺茅野地區)에서 하마톤베쓰초(濱頓別町)에 걸쳐 아사지노 대지(淺茅野臺地)에 제1 비행장이 건설되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사루후쓰무라 하마오니시베쓰(猿拂村濱鬼志別)에 제2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공사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약 3년이 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전을 맞이했기 때문에 대부분 사용 실적이 없는 상태에서 그 역할을 마쳤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현재 남겨진 명부, 사료, 수용시설 등을 종합하여 생각할 때 아사지노 비행장에는 600~800명 정도가 거주했을 것이고, 조선인은 300명 정도가 강제로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사망자 현황과 피해 증언에 의하면, 조선인 사망자들(99명)은 대부분 강제동원되었고 면서기, 일본 경찰, 헌병, 행정직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강제동원되었다.
홋카이도 지역은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 동원 기피 지역이기도 하면서 일본 내에서 가장 많은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동원한 지역이기도 했다.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 현장에서는 1943년 7월 8일부터 1944년 4월 17일 사이에 99명의 조선인이 사망했는데, 사인은 위장염이 많았고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죽었다. 그럼에도 건설은 주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조선인 징용자 희생자가 계속 나왔고 도망자의 변사도 있었다.
식사로는 조식으로 된장국, 단무지, 감자 또는 미역, 잡곡밥(쌀 40%, 보리 60%)이 제공되었으며, 중식으로는 우메보시가 있는 작은 주먹밥 2개, 저녁은 비슷한 메뉴로 무 튀김과 밥이 제공되었다. 이러한 식단을 제공받으면서 13시간 이상 노동했기 때문에 영양실조, 설사, 심장 약화 등으로 사망에 이르렀다.
또한 토건업자는 다코베야(タコ部屋)라고 불리는 열악한 숙소를 운영했는데, 이곳에서는 관리자의 밑에서 노동과 생활이 관리되었다. 이곳의 출입구는 하나로 창문은 철책으로 되어있었으며, 밤중에 불침번을 세우고 요소에는 맹견과 감시전망대의 감시원을 배치하여 노동자의 도망을 철저히 막았다. 또한 장시간의 노동으로 내몰기 위해 이곳에서는 공공연한 폭력지배에 의한 계급 질서가 형성되었으며, 이 질서를 침범하거나 도주할 때는 죽음에 이르는 제재가 가해지기도 했다.
사진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서인원, 「일본 홋카이도 아사지노비행장 건설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에 대한 고찰」, 『한일관계사학회』69, 2020.
- 北海道総合文化開発機構, 『北海道開拓殉難者調査報告書』, 北海道総合文化開発機構,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