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고노마이 광산
개요
제목 | 고노마이 광산 | 국가 / 지역 | 일본 / 홋카이도 몬베쓰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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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홋카이도 몬베쓰시 고노마이모토마치 (北海道紋別市鴻之舞元町) | |||
강제동원 시설 | 광산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스미토모 금속광산(주) | 동원 방식 | 모집 |
현재 | 스미토모 금속광산(주) | 피해 인원(추정) | 약 5,000명 |
설명
역사
1915년에 광맥이 발견된 고노마이 광산(鴻之舞鑛山)은 1917년 스미토모(住友)가 경영권을 얻은 이후 1973년 폐산까지 조업한 광산으로 금, 은, 동을 산출했다. 1918년에는 제련소가 완성되었으며, 의료 및 교육 시설이 개설되었다. 일본 당국이 1937년 8월 산금법을 공포하고 산금 5개년 계획을 결정하는 등 광물의 증산을 독려하여 1940년에는 산금량 전국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3년 3월 전국 470개 금 광산에 대한 휴폐산 정책으로 소속 광부들은 전환배치되었고, 1949년에 광산이 재개된 다음 1955년에 최고 생산량(금 2.98톤)을 달성한 후 1973년에 폐산되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일본인 광산 노동자가 병사로 징집되어 조업에 지장을 초래하자 조선인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 후 광산 노동자와 거주 가족의 증가로 1942년에는 인구 13,000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곳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에 관해서는, 고노마이 광산에서 1939년 여름 300여 명의 조선인 노무자 모집을 북해도청에 의뢰했고, 1940년에는 600여 명, 1941년에는 1,100여 명, 1942년에는 1,500여 명의 모집을 신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실제로 동원된 인원에 관해서는, 일본의 '가미모베쓰 역체 보존회(上藻別驛遞保存會)'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면, 1939년 강제연행으로 고노마이에 배치된 조선인 노동자는 302명이었으며, 1941년은 894명, 1942년은 1,498명으로, 총 2,694명이 강제동원되었다. 이 시기에는 정련소에서 배출되는 대량의 광배수(鑛排水)를 저류(貯留)하기 위한 대규모 침전지 조성을 위해 지자키구미(地崎組)에서 운영하는 통칭 '다코베야(タコ部屋)'라 불리는 강제 노동이 이루어졌다.
조선인의 동원은 대상 지역에 모집인이 상주하면서 행정관청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상시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차 모집(1939년 10월 7일, 302명)에는 일본의 홋카이도청 학무부 직업과, 몬베쓰 경찰서, 삿포로 광산 감독국, 홋카이도 광산 간화회, 오타루 경찰, 직업소개소, 수상경찰서는 물론 조선의 천안 군청 사회계와 천안 경찰서, 모집책도 관련되어 있었다.
고노마이 광산 입산자 중 탈출자는 473명이었다. 탈출은 시모노세키(下關)에서 하코다테(函館)까지 도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와 하코다테 도착 이후 광산 입산 직전에 이루어지는 두 가지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홋카이도 지역의 특성(1년 중 5개월이 적설기로 격리되는 지대)과 촘촘한 '도주자 색출 시스템'으로 인해 2~3일 이내에 색출되어 광산 측에 인계되었다. 사례금을 목적으로 한 통지와 밀고도 신속한 탈출자 색출에 기여했다. 또한 광산 측은 송출 당시 노무자 개인별로 사진이 첨부된 '고입조사표(雇入調査表)'를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색출 및 검거에 더욱 용이했다. 일단 탈출자가 발생하면, 광산 측은 하코다테, 오타루(小樽), 왓카나이(稚內) 경찰서 등 해당 경찰서에 동시에 전보를 보내 색출을 요청했다. 그리고 검거되면 해당 경찰서에 사의를 표하고 직원을 보내 인수했다. 그리고 색출 기간이 오래 걸리면 본적지 조회를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광산 노동 경험이 없는 조선의 농민들은 갱내 사고를 경험하고, 사고와 질병(병사) 등으로 많은 사망자를 낳았다. 고노마이 광산은 사고와 관련한 문서로 '공상보고요철(公傷報告要綴)’ 등의 기록을 남겼는데, 모리야 요시히코(守屋敬彦)가 공상보고요철을 비롯한 조선인 노무자 관계 사고 자료를 망라하여 남긴 '노동재해조우기록'에 따르면 1941년 12월 15일부터 1943년 10월 15일 동안 발생한 사고는 1,156건(852명)이었다. 또한 고노마이 광산이 발신한 전보를 분석한 정혜경에 따르면, 조선인의 사망과 관련된 전보는 219건이 있었으며 사망자는 43명에 달했다.
사진
※ 출처: Google Map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김인덕, 『노무동원 경로 연구: 국민징용, 할당모집, 관알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0.
- 정혜경, 「스미토모(住友) 고노마이(鴻之舞)광산 발신전보(發信電報)를 통해 살펴본 조선인 노무동원 실태」, 정혜경, 심재욱, 오일환, 김명환, 기타하라 미치코, 김난영 저, 『강제동원을 말한다―명부편(1) 이름만 남은 절규』, 선인, 2011.
- 朝鮮人強制連行実態調査報告書編集委員会, 札幌学院大学北海道委託調査報告書編集室 편, 『北海道と朝鮮人労働者 朝鮮人強制連行実態調査報告書』, 札幌学院大学生活協同組合, 1999.
- 上藻別驛遞保存會ホームページ https://kounomai-ekitei.jimdofr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