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가야누마 탄광
개요
제목 | 가야누마 탄광 | 국가 / 지역 | 일본 / 홋카이도 후루우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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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홋카이도 후루우군 도마리무라 가야누마지구 (北海道古宇郡泊村茅沼地區) | |||
강제동원 시설 | 탄광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가야누마탄화광업(주) | 동원 방식 | 모집 |
현재 | - | 피해 인원(추정) | 약 2,238명 |
설명
역사
가야누마 탄광은 연간 10만 톤을 약간 웃도는 정도의 소규모 탄광에 불과했지만, 홋카이도 지역에서 최초로 개광한 탄광이다. 가야누마 탄광(茅沼炭鑛)은 1856년 석탄이 발견되면서 개광했다. 다만 석탄의 발견과 함께 바로 개광한 것은 아니었다. 1861년 막부(幕府)에서는 미국인 블레이크(W. P. Blake)와 펌펠리(R. Pumpelly)를 초빙하여 조사를 진행했고, 1863년에 개광하여 1864년부터 석탄 채굴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1867년 영국인 기술자 가워(E. H. M. Gower)의 지도하에 1867년부터 본격적으로 석탄 채굴을 시작했다. 이후 서양의 탄광 기술이 도입되고, 철도와 증기선이 다니면서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처음 1856년부터 1868년까지는 막부가 운영했고,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전복된 이후에는 1869년부터 1883년까지는 메이지 정부가 파견한 개척사가 운영했지만, 1894년부터 민간에 이양되어 개광으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1964년에 폐산되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가야누마 탄광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1939년 130명, 1940년 276명, 1941년 2,243명, 1942년 348명, 1942년 3월 말 630명, 1942년 6월 말 630명으로 모두 2,238명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은 전북에서 끌려가거나 지역 유력자의 일방적인 통보에 불복하지 못하고 동원되었다.
탄광에서의 노동시간은 하루 9시간에서 10시간을 기본으로 2교대 혹은 3교대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10시간이라는 작업시간은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개인의 할당량을 채워야 그날의 작업이 끝났다. 몸이 아파서 쉬겠다고 요청하면 구타를 당하는 일도 있었고, 작업 현장에서는 이름 대신 번호나 조선인 혹은 반도인과 같은 멸칭으로 불렸다. 더욱이 외출조차 금지당한 채 조악한 식사를 제공받으며(1942~1943년 이후) 열악한 생활을 이어 나갔다.
이에 조선인 노무자들이 열악한 노무 환경과 부당한 대우에 대항하여 1941년 3월과 1944년 6월,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10월에는 퇴직금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으키며 저항하기도 했다.
사진
※ 출처: 『사진으로 보는 강제동원 이야기 일본 홋카이도(北海道)편』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김인덕, 『노무동원 경로 연구: 국민징용, 할당모집, 관알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20.
- 윤지현 편, 『사진으로 보는 강제동원 이야기 일본 홋카이도(北海道)편』, 국무총리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009.
- 정혜경, 『홋카이도 최초의 탄광 가야누마와 조선인 강제동원』, 선인, 2013.
- 하승현·정혜경, 『홋카이도 가야누마(茅沼)탄광에 강제동원된 전북 출신자의 피해 진상조사』,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1.
- 朝鮮人強制連行実態調査報告書編集委員会, 札幌学院大学北海道委託調査報告書編集室 편, 『北海道と朝鮮人労働者 朝鮮人強制連行実態調査報告書』, 札幌学院大学生活協同組合, 1999.
- 矢野牧夫, 丹治輝一, 桑原真人, 「石炭にみる北海道の歴史をさぐる(<特集>北海道の資源と環境)」, 『地学教育と科学運動』15, 地学団体研究会, 1986.
- 泊村ホームページ https://www.vill.tomari.hokkaido.jp/sangyoshigoto/energy/furusato/ene2.html?cat=/sangyoshigoto/energy/furusato/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