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나가사키 조선소
개요
제목 | 나가사키 조선소 (메이지 산업유산 시설) | 국가 / 지역 | 일본 /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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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아쿠노우라마치 1-1 (長崎県 長崎市 飽の浦町 1番1号) | |||
강제동원 시설 | 조선소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미쓰비시 중공업(三菱重工) | 동원 방식 | 관알선, 징용 |
현재 | 상동 | 피해 인원(추정) | 약 6,000명 |
설명
역사
나가사키 조선소(長崎造船所)는 1857년에 네덜란드인을 초빙하여 만들기 시작한 나가사키 용철소(長崎鎔鉄所)가 그 시작이며, 1860년에 관영(官營) 나가사키 제철소(長崎製鉄所)로 명칭을 변경하고 다음해 완공되었다. 미쓰비시(三菱)가 1884년부터 위탁운영을 했고 1887년에 불하받았다. 이후 미쯔비시는 나가사키 조선소에 제2 도크(1896년), 제3 도크(1905년) 완공, 자이언트 컨틸레버 크레인 도입((ジャイアント·カンチレバークレーン, 1909년) 등을 통해 전함 무사시(武蔵)를 비롯한 다수의 함선이 건조했다.
현재 나가사키 조선소는 미쓰비시 중공업에 속해 있으며, 나가사키 조선소의 일부인 고스게 수선장 터(小菅修船場跡), 자이언트 컨틸레버 크레인 등 5곳이 2015년에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제강, 조선, 석탄산업’(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 造船, 石炭産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일본 후생성이 패전 이후 1946년에 실시한 ‘조선인 노동자 조사에 관한 건’에 따르면 1944년에 3,474명, 1945년에 2,501명 등 총 5,975명의 조선인이 관알선을 통해 나가사키 조선소에 강제동원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인 노동자의 미불금 공탁처 일람표’에는 3,406명이, 나가사키 지방법무국이 소장한 공탁금 관련 자료에는 3,417명의 조선인이 기록되어 있다.
나가사키 조선소에는 1945년 6월 말에 62,776명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한 곳에 수용하기가 어려워 22개의 숙소에 분산했다. 그중 조선인 노무자들이 거주한 곳은 기바치료(木鉢寮), 사이와이료(幸燎), 후쿠다료(福田寮), 히라토코야료(平戶小屋寮), 이나사료(稻佐寮), 마루야마료(丸山寮), 고가쿠라료(小ヶ倉寮) 등 7곳이 있었다.
나가사키 조선소에는 조선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과 함께 일본 현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후자는 징용장을 받고 나가사키 조선소로 동원되었는데, 일본인들과 동일한 숙소에 배정받았으며 조선에서 동원된 이들의 숙소와 작업장이 달랐다. 예를 들어 오무타시(大牟田市)에 거주하고 있던 강제동원 피해자는 1943년에 징용장을 받고 기바치료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300여 명의 조선인이 일본 현지에서 동원되었다고 한다. 일본인들과 동일한 숙소였으나 동은 달랐고,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동에서만 점호가 있었다. 또한 강제동원된 지 5개월 이후 북한 지역 출신 조선인 1,500여 명이 기바치료에 왔는데, 이때 마루야마료로 숙소를 이동했다고 한다.
1943년 11월부터 약 5개월에 걸쳐 노무자들을 위해 2층 목조건물 53개 동으로 된 고가쿠라료가 만들어졌다. 한 동에 150명에서 200명이 생활할 수 있었고, 최대 9,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일본 패전 당시에는 약 8,000명(징용공 5,000여 명과 학도동원자 3,000여 명)이 고가쿠라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고가쿠라료는 당시 상당히 큰 규모의 숙소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생활한 조선인들도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산으로 생각해 볼 때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최소한 5,975명이고 조선인들이 여러 숙소에 분산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6,800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나가사키 조선소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의 증언도 있다. 피해자에 따르면 동(銅), 아연 도금공장에서 일하다가 발가락이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지만, 병원에서 주사 한 대만 맞고 휴가도 받지 못한 채 발이 부은 상태로 계속 일했다고 한다. 또 다른 피해자는 징용을 피해 숨었지만, 일본인 경찰 등에게 적발되어 나가사키 조선소로 보내졌고, 해군 보초와 헌병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노역했지만 월급, 그 외 수당들은 퇴직적립금, 국민저축 등의 명목으로 공제되어 거의 지급받지 못했다고 한다.
나가사키 조선소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강제동원뿐만 아니라 원폭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도 있었다. 한국 정부가 파악한 자료에 따르면 나가사키 조선소에 강제동원되고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은 13명이다. 하지만 나가사키 조선소에 강제동원되고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의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나가사키 조선소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수보다 적은 수가 강제동원된 히로시마 조선소에서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의 수가 더 많기 때문이다. 히로시마(広島) 조선소에는 2,8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는데, 이중 원폭 피해자는 45명이다. 나가사키 조선소는 히로시마 조선소보다 최소 2배 이상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는데, 원폭 피해자의 비율은 히로시마 조선소가 높다. 나가사키 조선소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중에는 황해도 출신 등 북한 지역 출신자가 있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부분을 조사한다면 나가사키 조선소에 강제동원된 후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의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민족문제연구소·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일본의 메이지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2017.
- 오일환,『일본 근대산업시설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 실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11.
- 허광무,『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 원폭피해에 대한 진상조사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를 중심으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0.
- 三菱重工ホームページ https://www.mhi.com/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