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미이케 탄광
개요
제목 | 미이케 탄광 (메이지 산업유산 시설) | 국가 / 지역 | 일본 /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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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미야하라초 1초메 86-3 등 (福岡県 大牟田市 宮原町 1丁目 86-3) | |||
강제동원 시설 | 탄광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미쓰이 광업소 (三井鑛業所) | 동원 방식 | 모집, 관알선, 징용 |
현재 | - | 피해 인원(추정) | 약 9,600명 |
설명
역사
미이케 탄광(三池炭鑛)은 후쿠오카현(福岡縣)과 구마모토현(熊本縣)에 걸쳐 자리 잡고 있었던 탄광이다. 후쿠오카현에는 오무타시(尾牟田市)와 미야마시(みやま市) 지역에, 그리고 구마모토현에는 아라오시(荒尾市) 지역에 걸쳐 탄광들이 있었고, 미쓰이(三井) 광업이 운영하고 있었다.
1889년부터 당시 재벌 기업이었던 미쓰이가 미이케 탄광을 운영하면서 일본 최대의 탄광이 되었다. 미이케 탄광은 원래 일본 정부가 운영하는 탄광으로 1873년 7월부터 운영이 되었고 당시 죄수들을 탄광 작업에 동원했다. 미쓰이는 1889년에 미이케 탄광을 불하받고 1931년까지 죄수들을 동원하면서 미이케 탄광을 운영했다. 미쓰이는 미이케 탄광을 미쓰이 광산 미이케 광업소로 명칭을 변경하고, 배연 시설 설치를 비롯한 탄광 시설을 확충하면서 미이케 탄광을 확장했다.
미이케 광업소는 아시아·태평양 전쟁 중에 만다(萬田), 미야우라(宮浦), 미카와(三川) 등 여러 갱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패전 이후 미쓰이 탄광의 대표적인 채굴 장소였던 미야우라 갱을 1968년에 폐광시켰고 이후 1997년까지 운영하고 있던 탄광을 모두 폐광시켰다. 미야우라 갱이 위치한 오무타시는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배연 시설의 굴뚝을 포함하여 미야우라 석탄 기념공원(宮浦石炭記念公園)과 함께 석탄산업과학관(石炭産業科学館)을 설치했다. 동 과학관의 전시 내용 중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노동(第二次世界大戦中の労働)’에는 조선인 징수자(朝鮮人徵收者), 여자 정신대(女子挺身隊), 국민노동보국대(国民労働報国隊)의 사진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중국이나 한반도 출신자, 그리고 연합군 포로의 노동도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종전 시기였던 1945년 8월에는 미이케 탄광 전체에서 조선인 2,294명, 중국인 2,348명, 포로 1,409명에 달했습니다”라는 간략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한편 미이케 탄광 관련 시설들은 중요문화재나 사적 등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5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메이지 산업유산 시설에는 미이케 탄광의 미야노하라(宮原) 갱, 만다 갱, 미야케 광산 전용철도 유적(池炭鉱専用鉄道敷跡)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조선인들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미야케 탄광의 미야우라갱, 만다갱, 미카와 갱등에서 노무자로 동원이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미이케 탄광에서 노무자로 동원된 조선인의 수가 최소 1,600여 명에서 최대 9,6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미쓰이는 미이케 탄광뿐만 아니라 미이케 제련소(三池製鍊所), 미이케 염료(三池染料), 전기화학공업 오무타 공장(電氣化學工業大牟工場), 미이케항(三池港) 등에도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고, 그 수는 1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후생성에서 작성한 ‘1946년 도도부현이 실시한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에는 1941년부터 만다 갱에 조선인들이 동원되었으며 그 수는 1,656명(1941년 2명, 1942년 229명, 1943년 648명, 1944년 664명, 1945년 11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동 자료의 조선인 명부에는 모집, 관알선, 징용으로 동원된 조선인 수가 기록되어 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모집으로 73명,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관알선으로 1,391명,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징용으로 293명 등 동원된 조선인들이 1,75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동 자료의 조선인 명부 부기에는 명부와는 달리 1,671명(942년 309명, 1943년 608명, 1944년 640명, 1945년 114명)이 동원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만다 갱에는 자유 모집으로 필요한 인원을 충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알선으로 많은 조선인이 동원되었던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미이케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수도 자료에 따라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먼저 미쓰이 광산이 작성한『자료 미쓰이 쟁의』에서는 1945년 6월 당시 미쓰이 광산이 운영하는 석탄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12,338명이었고 이 중 미이케 탄광에는 1945년 8월 현재 2,297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후쿠오카현에서 작성한『현정중요사항』의 ‘이입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표’에서는 1944년 1월 당시 미이케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은 2,376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연합군이 작성한 ‘미국전략폭격조사단 보고서’에는 1945년 6월 현재 미이케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이 5,152명이었다고 한다.『일제하피징용자명부』에서는 1943년 8월부터 1945년 9월까지 9,611명의 조선인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46년에 후생성이 작성한 미이케 탄광 전체 종합표에서는 9,264명(1940년 93명, 1941년 96명, 1942년 1,834명, 1943년 2,889명, 1944년 2,466명, 1945년 1,886명)의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미이케 탄광에 강제동원되었던 피해자들의 증언도 남아있다.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500m 지하에 석탄을 채굴하면서 하루 10시간~12시간, 한 달에 20일 이상을 일해야 했다고 한다. 다른 피해자는 2교대로 갱도를 떠받치는 기둥 세우는 작업을 했고, 갱도가 무너지거나 가스가 폭발하는 사고가 많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진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필자 촬영
※ 출처: 오일환, 앞의 자료, p.65
참고문헌
- 민족문제연구소·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일본의 메이지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2017.
- 오일환, 『일본 근대산업시설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 실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11.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大牟田市ホームページ https://www.city.omuta.lg.jp/default.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