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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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하타 제철소

개요

야하타 제철소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야하타 제철소 (메이지 산업유산 시설) 국가 / 지역 일본 /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현주소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도바타구 도비하타초 1-1 (福岡県 北九州市 戸畑区 飛幡町 1番1号)
강제동원 시설 제철소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일본제철(日本製鐵) 동원 방식 징용
현재 상동 피해 인원(추정) 약 2,800 ~ 3,800명

설명

역사

야하타 제철소(八幡製鉄所)는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北九州市)에 위치하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제철소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받은 배상금의 일부를 사용하여 1901년에 관영(官營)으로 세워졌다. 이와테현(岩手県) 가마이시시(釜石市)에 1880년에 세워진 일본 최초의 제철소인 가마이시 광산(釜石鉱山) 다나카 제철소(田中製鉄所)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제철소이다. 1906년에는 일본 내 철강 생산량의 90%를 차지했으며, 이는 당시 일본의 중공업이 발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지쿠호 탄전(筑穂炭田) 일대에서 후타세 탄광(二瀬炭鉱)을 운영하기도 했다.

관영으로 운영되던 야하타 제철소는 1934년 1월에 ‘일본제철 주식회사법’에 따라 관민의 제철 사업이 통합되어 일본제철(日本製鐵)이 출범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1950년 4월에 일본제철이 해체되면서 야하타 제철이 되었고, 1970년에는 후지제철(富士製鐵)과 합병이 되어 신일본제철(新日本製鐵)에 속하게 된다. 이후 신일본제철이 2012년에 스미토모 금속공업(住友金属工業)과 합병하면서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이 되었고, 2019년 4월에 회사명이 일본제철로 변경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야하타 제철소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등재되었다. 2015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제강, 조선, 석탄산업’(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 造船, 石炭産業) 중 야하타 제철소의 제철소, 본사 사무소, 수선 공장, 단야공장(鍛冶工場)이 포함되었다.

이와 함께 야하타 제철소를 운영하는 일본제철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으로 국내에 알려져 있다. 피해자인 신천수, 여운택은 1997년 2월에 당시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일본의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2003년 10월에 최고재판소(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동일)에서 최종적으로 기각 판결을 받았다. 이후 김규수, 신천수, 여운택, 이춘식은 2005년 2월에 당시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2018년 10월 대법원은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일본제철 주식회사사 1934~1950』에 따르면 야하타 제철소에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된 것은 1942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자료에는 조선인들의 동원을 ‘철강업으로서 최초의 노무자 강제징용’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1942년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1,777명이었으며, 일본이 패전한 1945년 8월 당시에는 2,808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당시 철강업계의 노동 방식은 주간 근무, 주야 2교대 및 3교대 근무가 있었는데, 야하타 제철소의 조선인 노무자들은 주야 2교대로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을 했다.

1946년에 후생성이 작성한 ‘조선인 노동자에 관한 조사 결과’에서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3,820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소위 조선인 징용자 등에 관한 명부’에서는 3,448명의 조선인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조선인 노무자 등 공탁금 문서’에는 3,389명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과 야하타 제철소가 1947년 1월과 2월에 각각 약 269,500엔과 약 26,000엔을 공탁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 출신 노무자 미급여금 예저금 등 명세서’에는 동원된 조선인이 3,042명, 공탁금 약 2,681,810엔이 기록되어 있다.

야하타 제철소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은 ‘1일 2교대로 근무하고 외출과 개인행동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고 친구와 도망갔다가 붙잡혀 며칠간 고문을 당했다’, ‘1일 3교대로 일했고 조선인에 대한 민족 차별 분위기가 있었다. 징용이라는 글자가 있는 옷을 입어서 도망갈 수 없었고, 도망갔다가 잡히면 죽을 정도로 맞았다’라는 취지의 증언을 했다.

사진

야하타 제철소 위치 area_map_35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야하타 제철소 사무소(2023년 12월) 야하타 제철소 사무소(2023년 12월)

※ 출처: 필자 촬영

야하타 제철소 안내판 1(2023년 12월) 야하타 제철소 안내판 1(2023년 12월)

※ 출처: 필자 촬영

야하타 제철소 안내판 2(2023년 12월) 야하타 제철소 안내판 2(2023년 12월)

※ 출처: 필자 촬영

야하타 제철소 안내판 3(2023년 12월) 야하타 제철소 안내판 3(2023년 12월)

※ 출처: 필자 촬영

야하타 제철소 안내 시설(2023년 12월) 야하타 제철소 안내 시설(2023년 12월)

※ 출처: 필자 촬영

참고문헌

  • 김광열, 『태평양전쟁기 일본의 군수동원법 및 군수회사지정제도와 조선인 강제동원–일본과 조선에서의 제도 운용을 중심으로-』, 2020.
  • 민족문제연구소·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일본의 메이지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2017.
  • 오일환, 『일본 근대산업시설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 실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11.
  • 九州の世界遺産ホームページ https://www.welcomekyushu.jp/world_heritage/
  •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ホームページ http://www.japansmeijiindustrialrevolu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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