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하기 반사로
개요
제목 | 하기 반사로 (메이지 산업유산 시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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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야마구치현 하기시 | 시설 유형 | 공업 시설 |
현주소 | 야마구치현 하기시 진토 4897-7 (山口県 萩市 椿東 4897-7) |
설명
하기 반사로(萩反射炉)는 에도시대 말기인 1856년, 조슈번(長州藩)이 서양식 철제 대포를 주조하기 위해 건설한 금속용해로 시설이다. 조슈번은 현재의 야마구치현(山口県)에 해당하며,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끈 주요 번 중 하나로, 특히 사쓰마번(薩摩藩), 도사번(土佐藩)과 함께 에도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신정부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들이 조슈번 출신이다.
하기 반사로는 조슈번이 서양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시도한 노력 일환으로, 철제 대포를 주조하기 위한 서양식 반사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당시 일본은 서양 열강의 압력에 직면한 상태였으며, 이를 대비하기 위해 각 번들은 군사력 증강에 힘쓰고 있었다. 반사로는 서양에서 개발된 금속용해로로, 철을 녹여 대포나 무기를 주조하는 데 필요한 시설이었다.
1855년, 조슈번은 이미 반사로를 가동하고 있던 사가번(佐賀藩, 현재의 사가시와 나가사키현 일대)에 가신들을 파견해 철제 대포 주조 방법을 전수받으려 했다. 그러나 사가번은 군사적 기술 유출을 우려해 주조 방법 전수를 거부했다. 대신, 반사로의 스케치를 제공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조슈번은 이 스케치를 바탕으로 반사로를 제작하게 되었다. 비록 주조 방법 전수에는 실패했지만, 스케치를 참고해 서양의 금속 주조 기술을 기반으로 철제 대포를 만들기 위한 실험적 반사로를 건설한 것이다. 이 스케치 자체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조슈번의 고문서에 ‘1856년에 시험 삼아 반사로를 만들어 대포 주조를 시도했으나, 본격적인 반사로 건설은 중지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하기 반사로는 이 시기에 시험적으로 건설된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굴뚝에 해당한다. 굴뚝의 높이는 약 10.5m로, 이는 서양의 철제 대포 주조 기술서를 참고하여 축소된 형태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반사로 제작에 있어 참고한 서적은 네덜란드의 철제 주조 대포 기술서 『Het gewezen in’s Rijks Ijzer-geschutgieterij te Luik(리에주 왕립 철제 대포 주조소의 주조법)』로, 이를 번역한 일본어 서적 『철공주감도(鉄熕鋳鑑図)』를 통해 조슈번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려 했다.
비록 하기 반사로는 본격적인 대규모 생산 시설로 자리잡지 못하고 시험용으로 그쳤지만, 일본이 서양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이를 적용하려 했던 초기 노력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조슈번은 군사력 강화와 서양식 기술 도입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서양의 기술을 직접적으로 습득해 자국 내에서 실험한 사례는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통해 학습하고 발전해 나간 과정을 보여준다.
하기 반사로는 2015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철강, 조선 및 석탄 산업’(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 造船, 石炭産業)의 일부로 포함되었으며 ‘구역 1: 하기’에 속한다. 이 시설은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기술을 도입하고, 국가 통제를 통해 군사력 증강을 추진한 역사를 보여주며, 단순히 서양의 위협에 자구적으로 대응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기 반사로는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간접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슈번 출신의 정치인들이 주도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확장을 추구했고, 이 과정에서 조선 침략과 한일병합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 철제 대포와 같은 군사력 강화의 시도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며 주변국들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조슈번 출신 인물들은 이후 조선 침략과 통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토는 한일병합 과정에서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협했고, 이러한 일본의 대외 정책은 군사력 증강과 상층부 주도의 근대화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따라서 하기 반사로와 같은 군사력 증강의 유산은 메이지 유신 이후 한일 관계의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사진
※ 출처: 하기시 관광협회
※ 출처: 하기시 관광협회
※ 출처: 하기시 관광협회
※ 출처: 하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