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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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로나이 탄광

개요

신호로나이 탄광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신호로나이 탄광 국가 / 지역 일본 / 홋카이도 미카사시
현주소 홋카이도 미카사시 도마쓰미도리초 (北海道 三笠市 唐松緑町)
강제동원 시설 탄광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 (北海道炭礦汽船株式会社) 동원 방식 모집, 관알선, 징용
현재 상동 피해 인원(추정) 약 3,000명

설명

역사

신호로나이 탄광(新幌内炭鉱)은 홋카이도 미카사시(三笠市)에 위치한 탄광이다. 미카사시는 일본 유수의 탄전 지대인 이시가리 탄전(石狩炭田)에 위치해 있으며, 1868년에 호로나이(幌内) 지역에서 석탄이 발견되면서 석탄 채굴이 본격화되었다. 신호로나이 탄광 이외에 호로나이 탄광(幌内炭鉱)과 폰베쓰 탄광(奔別炭鉱) 등 여러 탄광들이 미카사시에 있었다.

닛시 탄광기선 주식회사(日支炭鉱汽船株式會社)가 1925년에 신호로나이 탄광 개발을 시작했으며, 개발 도중 세 번의 가스폭발 사고를 발생했다. 1934년부터 쇼와 광업(昭和鉱業)이 석탄 채굴을 시작했고, 1941년에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가 신호로나이 탄광을 인수했다. 1967년에 호로나이 탄광과 통합되어 신미카사 탄광(新三笠炭鉱)이 되었고, 1973년에 폐광되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신호로나이 탄광에는 약 3,000명 정도의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케우치가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1943년 5월부터 1944년 8월까지 신호로나이 탄광에 958명이 강제동원되었고, 1942년 6월 현재 672명, 1943년 6월 현재 901명, 1943년 12월 현재 1,090명, 1944년 12월 현재 1,341명, 1945년 6월 현재 1,519명의 조선인들이 신호로나이 탄광에서 노역을 하고 있었다.

신호로나이 탄광에 강제동원되었던 피해자는 제3 협화료(協和寮)라는 기숙사에서 생활했으며 200명 정도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신호로나이 탄광에서의 생활을 아래와 증언했다.

  • 질문: 집으로 돈 부칠 수도 있었어요?
  • 답변: 여기서 돈 있기나 하간? 보통사람이. 여기서 돈 못부쳐. 돈이 작을 뿐 아니라, 먹는 것이 시원찮은디 어떻게 또 좀 먹어야 할거 아녀. 집에 돈 부칠 새가 어디가 있어. 거기 식량이 우리 첫 번에 갔을 적에는 콩. 콩이 반절 이상. 그리고 나머지는 쌀, 현미쌀 약간 줬거든. 근데 그게 날이 갈수록 쌀은 없어져. 쌀은 없어지고 그 담에 콩만 넣어. 인제 콩밥. 무슨 형무소처럼~ 그러면 그걸 먹으면은 소화가 잘 되나? 소화가 잘 안돼. 만날 설사만 하고~ 전쟁 말 항복하기 전에는 거진 뭐 밥이라고는 쌀이라고는 만들 새가[없어]. 그러니 누가 돈 부칠 새가 어디가 있어~ 일해서 돈 쪼금 벌은 사람들은 뭐 [사]먹고. 그렇지 않으면은 일하고 버티나.
  • 질문: 탄광 일은 위험하진 않았어요?
  • 답변: 아이~ 사고 많지. 우리 반에서는 사고는 안 났는데, 먼저 간 사람 들에선 있었어. 많이 있어. 탄광 내에서 발파작업 하다가 폭파작업 하다가 죽는 수도 있고, 또광이 무너져 갖고서 매몰되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야. 이게 광맥이 쭉 이렇게 있으면은, 지하로 몇천미터가 쭉 뚫렸으니까.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는 1939년부터 할당 모집,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관알선을 통해 신호로나이 탄광 등으로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신호로나이 탄광은 할당 모집으로 1941년 2차례에 걸쳐 50명, 48명씩 총 98명, 1942년에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24명, 38명씩 총 62명, 총 160명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다. 또 다른 자료에는 1942년 1월 0명, 2월 50명, 3월 38명, 4월 0명, 5월 73명, 6월 0명으로 1942년에 161명의 조선인 광부를 데려왔다고 한다. 두 자료는 연도와 횟수는 다르지만,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수는 1명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관알선의 경우 신호로나이 탄광은 35회 신청을 했고, 홋카이도청(北海道廳)은 10,536명을 승인했다. 이 중 조선총독부는 4,365명을 승인했고, 군 인계 인원은 1,497명이었다. 1942년 8월 9일부터 1945년 6월 16일까지 1,426명의 조선인들이 신호로나이 탄광으로 출발했고, 도중에 탈출한 208명을 제외하고 신호로나이 탄광에 도착한 조선인은 3,054명이었다.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는 관알선으로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하기 위해 부산에서 출장소를 운영했다. 부산 출장소는 1941년에 이미 운영되고 있었으며,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 노무부 산하였다.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가 운영하는 탄광에 조선인을 강제동원하는 데 부산 출장소는 큰 역할을 했다.

사진

신호로나이 탄광 위치 area_map_03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신호로나이 탄광 렌샤 갱 입구(連卸坑口)(2019년 4월) 신호로나이 탄광 렌샤 갱 입구(連卸坑口)(2019년 4월)

※ 출처: Google Map

신호로나이 탄광 혼샤 갱 입구(本卸坑口)(2019년 4월) 신호로나이 탄광 혼샤 갱 입구(本卸坑口)(2019년 4월)

※ 출처: Google Map

신호로나이 탄광 혼샤 갱 입구와 렌샤 갱 입구(2019년 4월) 신호로나이 탄광 혼샤 갱 입구와 렌샤 갱 입구(2019년 4월)

※ 출처: Google Map

신호로나이 탄광 발전소(2012년) 신호로나이 탄광 발전소(2012년)

※ 출처: 廃墟検索地図ホームページ

신호로나이 탄광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단체 사진 1
(해방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증언)
신호로나이 탄광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단체 사진 1 (해방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증언)

※ 출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아홉머리 넘어 북해도로–홋카이도 강제 피해 구술 자료집』, 2009, p.124.

신호로나이 탄광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단체 사진 2
(해방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증언)
신호로나이 탄광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단체 사진 2 (해방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증언)

※ 출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아홉머리 넘어 북해도로–홋카이도 강제 피해 구술 자료집』, 2009, p.125.

참고문헌

  • 노영종,「일제 말기 충남지역 노동력 강제동원과 거부투쟁」, 충남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9.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아홉머리 넘어 북해도로–홋카이도 강제 피해 구술 자료집』, 2009.
  • 한혜인,「‘조선인강제연행’에서의 강제성의 한 단면-홋카이도탄광기선주식회사를 중심으로-」,『일본어문학』10, 2007,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長澤秀,「資料-北炭と朝鮮人強制連行」,『史苑』56, 1995.
  • 守屋敬彦,「第二次世界大戰下における朝鮮人强制連行の統計的硏究-被連行者數について-」,『首都大學紀要』13, 1994.
  • 炭鉄港ポータルサイトホームページ https://3city.net/
  • 炭鉄港デジタル資料館ホームページ https://3city.net/archives/
  • 廃墟検索地図ホームページ https://haikyo.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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