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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야마다 탄광

개요

시모야마다 탄광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시모야마다 탄광 국가 / 지역 일본 / 후쿠오카현 가마시
현주소 후쿠오카현 가마시 시모야마다 (福岡県 嘉麻市 下山田)
강제동원 시설 탄광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후루카와 광업 주식회사 (古河鉱業株式会社) 동원 방식 미상
현재 후루카와 기계 금속 (古河機械金属) 피해 인원(추정) 약 3,000명

설명

역사

시모야마다 탄광(下山田炭鉱)은 일본 후쿠오카현 가마시(嘉麻市)에 위치한 탄광으로, 1886년경에 처음 채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도야마 미쓰루(頭山満)가 1890년 해군 예비탄전 해방으로 광구를 확보하였고, 1894년 일본의 대표적인 광산업자 후루카와 이치베에(古河市兵衛)가 이를 인수하면서 탄광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시모야마다 탄광은 일본 석탄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특히 기술적 혁신을 통해 채굴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1898년 시모야마다 탄광은 일본 최초로 전기 기술을 도입한 탄광이 되었다. 탄광에는 80kW 발전기와 증기 보일러 두 대, 그리고 전기 권양기(電気捲揚機)가 설치되었으며, 이로 인해 전기를 이용한 기계적 채굴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기술적 혁신은 석탄 채굴 작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했으며, 일본 내 석탄 산업 전반에 걸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수동으로 이루어지던 채굴 작업이 기계화됨에 따라 생산성이 급격히 증가했고, 시모야마다 탄광은 일본 석탄 산업 발전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기를 사용한 작업은 석탄 채굴뿐만 아니라 운반 작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수작업에 의존했던 탄광 작업이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는 다소 경감되었고, 생산량은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기술적 혁신 덕분에 시모야마다 탄광은 일본 내에서 석탄 산업 발전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게 되었으며,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기술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탄광 작업의 위험성은 여전했다. 1942년, 시모야마다 탄광에서는 가스 폭발 사고가 발생해 10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고는 탄광 작업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탄광의 안전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모야마다 탄광은 일본의 산업 발전을 위한 중요한 자원 공급지로 운영이 계속되었다.

탄광 운영이 지속되었으나,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자원 고갈과 함께 사고 발생 빈도가 증가했다. 1969년 9월 22일, 또 한 번 가스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탄광 내부에서 대규모 화재가 일어났다. 이 화재는 결국 물을 주입해 진압되었으나, 사고로 인한 피해와 갱도 붕괴, 암반 노후화 등으로 인해 탄광은 더 이상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시모야마다 탄광은 1970년 1월, 채굴 작업을 완전히 중단하고 폐광되었다.

폐광 이후에도 시모야마다 탄광의 다양한 유적은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1955년경에 건설된 시모야마다 탄광 병원은 현재 사무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탄광 주변에는 사택, 제2 갱구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특히 콘크리트 기반의 유적과 변전소로 추정되는 건물 유적, 창고 등은 당시 탄광 운영의 규모와 중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들이다. 이 유적들은 단순히 탄광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시모야마다 탄광은 일본의 석탄 산업 발전과 전쟁 준비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 동원된 대표적인 현장 중 하나였다. 연구에 따르면, 시모야마다 탄광에 강제로 연행된 조선인의 수는 약 3,000명에 달하며, 이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의 전쟁 수행과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원되었다.

1940년에 발간된 일본탄광협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당국은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임금, 복리 시설 등에서 차별을 두지 않고 일본인과 동일하게 대우했다고 주장하였다. 보고서에서는 ‘임금, 복리 시설, 그 외 전반에 걸쳐 차별적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어를 이해할 수 있는 관리자를 두어 조선인 노동자들의 상황을 배려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표면적인 방침에 불과했을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에 명시된 복리 후생이나 주거 지원 등이 실질적으로 제공되었는지는 불분명하며, 대부분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제 노동이라는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또한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체제 하에서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제로 받아야 했다. 시모야마다 탄광의 조선인은 수시로 군대식 교련 훈련을 받아야 했고, 이를 통해 집단적 규율 아래 생활해야 했다. 또한 ‘석탄 산업을 통해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 완수’를 강조하는 교육이 강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 민족적 자긍심을 억압하고 동화시키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시모야마다 탄광에서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과 차별 속에서 혹독한 현실을 살아가야 했다. 이들은 일본의 전쟁 경제를 위해 강제 동원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고통과 희생을 치렀다. 시모야마다 탄광에서 벌어진 이러한 역사는 단순한 산업 발전의 역사가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했던 차별과 억압의 역사로도 기억되어야 한다.

사진

시모야마다 탄광 위치 area_map_29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시모야마다 탄광 광부 주택(시기 미상) 시모야마다 탄광 광부 주택(시기 미상)

※ 출처: 야스타케 아쓰코·기쿠치 시게토모「筑豊山田における大手企業の炭鉱集落建設過程」

참고문헌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安武敦子·菊池成朋,「筑豊山田における大手企業の炭鉱集落建設過程」,『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集』540호, 2001.
  • 日本鉱山協会,「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 1940.
  • 飯塚観光協会ホームページ https://kankou-iizuka.jp/topic_15/
  • 飯塚市/飯塚市デジタルミュージアムホームページ https://adeac.jp/iizuka-city/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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