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야마노 탄광
개요
제목 | 야마노 탄광 | 국가 / 지역 | 일본 / 후쿠오카현 가마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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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후쿠오카현 가마시 북부일대 (福岡県 嘉麻市) | |||
강제동원 시설 | 탄광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미쓰이 광산 주식회사 (三井鉱山株式会社) | 동원 방식 | 미상 |
현재 | 닛폰 코크 앤 엔지니어링 (日本コークス工業株式会社) | 피해 인원(추정) | 약 6,000 명 |
설명
역사
야마노 탄광(山野炭鉱)은 일본 후쿠오카현 가마시(嘉麻市) 북부 일대에 위치했던 대표적인 탄광 중 하나로,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야마노 탄광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898년에 18세기 초 이곳에서 광부들이 채굴 중에 발생한 재난과 관련된 공양비(供養碑)가 발견된 점을 고려할 때, 에도 시대 이전부터 이미 석탄 채굴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가마시 지역은 에도 시대에도 중요한 석탄 채굴지 중 하나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893~1894년경 미쓰이 광산(三井鉱山)이 이 지역에서 석탄 채굴 가능성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졌다. 1895년, 미쓰이 광산은 약 188만 평에 이르는 광구를 매수한 것을 시작으로, 1896년에는 61만 평, 1898년에는 10만 5천 평을 추가로 매입하며 석탄 채굴을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 이렇게 확보된 광구 면적은 총 434만 4천 평에 달하며, 이 과정에서 야마노 탄광은 1898년에 처음으로 개산(開山)하게 되었다. 이후 야마노 탄광은 일본 내에서 중요한 석탄 채굴지로 성장하며 산업 발전에 기여를 했다.
야마노 탄광의 갱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1갱은 우루시오역(漆生駅) 인근에 위치했으며, 제2갱과 제3갱은 가모오역(鴨生駅) 부근에 있었다. 이 탄광은 일본의 급속한 산업 발전과 전쟁을 위한 에너지 자원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지역 경제도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야마노 탄광의 역사에는 비극적인 사건도 포함되어 있다. 1965년, 이곳에서 대규모 가스 폭발 사건이 발생하여 237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는 당시 일본의 석탄 채굴 현장에서 발생한 가장 큰 사고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그 결과 야마노 탄광은 경제적 타격과 함께 안전 문제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고, 1973년에 결국 폐산되었다. 이와 같은 비극적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현재 이나쓰키마치 정제 40주년 기념공원(稲築町町制40周年記念公園) 내에 미쓰이 야마노 광업 학교 훈련 갱도(三井山野鉱業練習坑道)와 1965년 가스 폭발 사건의 위령비가 남아 있다. 또한, 가마시 히라(平) 일대에는 당시 야마노 탄광의 광부들이 거주했던 주택들이 아직도 남아있어, 당시 광부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야마노 탄광도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된 대표적인 탄광 중 하나였다. 다케우치 야스토(竹内康人)의 연구에 따르면, 야마노 탄광에는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강제로 연행되어 노동에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의 석탄 생산을 뒷받침하기 위해 착취당했으며, 극도로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서 고통을 겪었다.
1940년에 일본탄광협회에서 발행한 『반도인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半島人勞務者ニ關スル調査報告)』에 따르면, 당시 일본 당국은 '내선융화(內鮮融和)'라는 명목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고 표면적으로는 주장했다. 보고서에서는 일본인 광부가 경험을 통해 조선인들을 '골육의 정애(骨肉の情愛)'로 지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공무 외에는 경칭을 사용하고 상호 존중을 강조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일본 정부는 '황국신민의 의무 함양'을 목표로 조선인들에게 매일 황국신민의 선서를 강제로 낭독하게 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강압적 교육을 실시했다고 보고서는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침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정책에 불과했으며, 실제로는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착취가 만연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 노동자들과 비교해 훨씬 낮은 임금을 받았고, 힘든 중노동에 투입되었다. 야마노 탄광에서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활하였으며, 그들의 건강과 안전은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이 거주하던 숙소는 비위생적이고 협소했으며, 최소한의 생활 필수품조차 제공받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다.
특히, 1940년 9월 1일부터 '반도 종업원 사역 요강(半島従業員使役要綱)'이 제정 및 실시되면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 요강은 조선인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매뉴얼로, 인솔 지도원과 현장 지도원의 역할, 수당 지급 방법, 의사소통 방식 등 조선인 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세밀한 규정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매뉴얼의 존재는 야마노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을 시사하며, 이 시기 야마노 탄광에서의 조선인 강제 노동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야마노 탄광은 일본의 산업 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탄광 중 하나였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 구조 속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며 강제 노동에 시달렸고, 그들의 고통은 지금도 역사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
사진
참고문헌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日本鉱山協会,「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 1940.
-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