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오미네 탄광
개요
제목 | 오미네 탄광 | 국가 / 지역 | 일본 / 후쿠오카현 오토마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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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후쿠오카현 오토마치 다이교지 (福岡県 大任町 大行事) | |||
강제동원 시설 | 탄광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후루카와 광업 주식회사 (古河鉱業株式会社) | 동원 방식 | 미상 |
현재 | 후루카와 기계 금속 (古河機械金属) | 피해 인원(추정) | 약 6,000명 |
설명
역사
오미네 탄광(大峰炭鉱)은 후쿠오카현 후쿠치마치 오토마치 다이교지(大橋寺) 일대에 위치했던 일본의 주요 탄광 중 하나로,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탄광은 1893년, 일본의 저명한 민족주의자 도야마 미쓰루(頭山満)가 광구 허가를 받은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산업화를 가속화하고 있었으며, 석탄은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오미네 탄광은 일본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원 공급지로 성장했다.
오미네 탄광은 그 후 아사노 소이치로(浅野総一郎)와 후지타 덴사부로(藤田伝三郎)와 같은 주요 기업인들의 손을 거치며 점차 규모가 확대되었다. 1894년에는 하라 로쿠로(原六郎)의 명의로 변경되었고, 이 시기 탄광은 오토 탄광(大任炭鉱)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여러 주체의 손을 거친 후 1939년, 일본의 주요 광업 회사 중 하나인 후루카와 광업(古河鉱業)이 오미네 탄광을 매수하여 본격적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오미네 탄광은 20세기 중반까지 일본의 중요한 석탄 채굴지로 자리 잡았으며, 일본의 산업화와 전쟁 준비에 필요한 석탄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70년, 일본의 산업 구조 변화와 석탄 수요 감소로 인해 오미네 탄광은 결국 폐광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 전체적으로 석탄 산업이 쇠퇴하는 흐름과 맞물린 결과였다.
현재 오미네 탄광의 흔적으로는 탄광 사무소와 공동 목욕탕 건물이 남아 있으며, 이 건물들은 당시 탄광 노동자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또한 탄광 인근의 휴가 묘지(日向墓地)에는 오미네 탄광에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묘지가 남아 있다. 이 묘지는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비참한 처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장소로, 조선인들이 겪었던 고통과 희생을 되새기게 한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오미네 탄광 역시 다른 일본의 주요 탄광들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된 현장 중 하나였다. 다케우치 야스토(竹内康人)의 연구에 따르면, 1944년 1월까지 오미네 탄광에 강제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의 수는 6,000명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면서 대규모로 조선인 노동력을 동원한 결과였다.
강제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탄광 내에서 강제 노동을 강요받았다. 이들은 주로 아이칸료(愛汗寮), 뎃신료(鉄心寮), 요신료(陽信寮) 등의 기숙사에 수용되었으며,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 조차 제대로 제공받지 못한 채 고된 노동을 이어가야 했다. 더욱이, 조선인 여성들은 이요야(伊予屋), 쇼와테이(昭和停), 야마토야(大和屋) 등의 시설에서 성노예로 고통 받았다고 전해지며, 이는 당시 일본의 탄광에서 이루어진 여성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오미네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겪었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는 1944년 3월 13일에 발생한 조선인 광부 봉기 사건이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 한 명이 절도와 탈주 혐의로 탄광 사무소로 끌려가 일본인 지도원 5명에게 심한 폭행을 당한 후 사망하였고, 이에 분노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일본인 지도원들을 폭행하고, 탄광 사무소와 기숙사의 기물을 파괴하며 항의했다. 이 사건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극심한 차별과 억압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오미네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한편, 1940년에 일본탄광협회에서 발행한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에서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내선융화(內鮮融和) 정책에 따라 차별 없이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받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보고서에서는 일본인 종업원들에게 차별적 발언이나 모멸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교육하고, 조선인 노동자들과의 협력 작업을 강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내지인(일본 본토인)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차별이 없었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인 광부 봉기 사건에서 보듯이, 조선인 노동자들은 극도로 열악한 대우를 받았으며, 심지어 일본인 감독관들의 폭력에 시달렸다. 이러한 폭력과 차별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겪은 고통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당시 일본 정부가 내세운 ‘내선융화’ 정책은 표면적인 구호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오미네 탄광에서의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 준비 과정에서 벌어진 잔혹한 역사 중 하나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이 겪은 고통과 희생은 일본의 산업 발전을 위한 도구로 착취당한 결과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오미네 탄광에서의 강제 동원과 관련된 더욱 자세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후속 연구와 사료 공개가 절실히 필요하다.
사진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日本鉱山協会,「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 1940.
-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