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다가와 탄광
개요
제목 | 다가와 탄광 | 국가 / 지역 | 일본 /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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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오아자이타 2734-1 (福岡県 田川市 大字伊田 2734-1) | |||
강제동원 시설 | 탄광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미쓰이 광산 주식회사 (三井鉱山株式会社) | 동원 방식 | 미상 |
현재 | 닛폰 코크 앤 엔지니어링 (日本コークス工業株式会社) | 피해 인원(추정) | 약 6,000명 |
설명
역사
다가와 탄광(田川炭鉱)은 일본의 지쿠호 지방(筑豊地方)에서 대표적인 탄광으로,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지역이다. 지쿠호 지방에서 처음 석탄이 발견된 시기는 1478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격적으로 석탄 생산량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부터였다.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 정부는 지쿠호 지방의 여러 소규모 갱구들이 난립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정광구(選定鑛區)’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는 국가가 특정 지역을 지정하여 광업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후 일본의 주요 대기업들이 지쿠호 지방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후루카와(古河) 등의 기업들이 이 지역에 들어섰고, 그중에서도 다가와(田川) 지역에 특히 주목한 것은 미쓰이(三井)였다.
1900년, 미쓰이 광산은 다가와 지역의 이타(伊田) 및 유게타(弓削田) 갱구를 매수하고 석탄 생산을 본격화하였다. 1910년에는 이타 갱구에 두 개의 수직갱로를 증설하여 광산 규모를 대폭 확장하였다. 이후 미쓰이는 1918년에 다가와 광업소(三井田川鉱業所)로 개칭하고, 광부 16,438명과 직원 571명(1919년 기준)을 거느리며 지쿠호 탄전(筑豊炭田)의 주요 탄광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다가와 탄광은 일본의 석탄 산업을 이끄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 내 산업 발전과 전력 공급에 기여를 했다.
석탄 산업의 발달과 함께 다가와 지역의 인프라가 급속히 발전하고 인구가 급증하였다. 이에 따라 유게타 지역과 이타 지역이 합병되어 1943년에 인구 73,000명을 넘는 대규모 탄광도시 다가와시(田川市)가 탄생하였다. 당시 다가와시는 석탄산업에 의존하여 번성한 대표적인 도시였으며, 탄광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밀집하여 거주하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산업 구조가 변화하면서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감소하게 되었고, 결국 다가와 탄광은 1964년에 폐산하게 되었다. 현재 이타갱 터에 세워진 다가와시 석탄·역사 박물관은 탄광의 역사를 보존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탄갱 이야기꾼 사업(炭坑の語り部事業)’을 2008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 주민들이 탄광과 관련된 기억을 직접 전달하는 프로그램으로, 탄광의 역사와 지역 사회의 변화를 기록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다가와 탄광은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인들이 강제로 동원된 현장 중 하나였다. 竹内康人의 연구에 따르면, 다가와 탄광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의 수는 6,000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가와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았으며, 생존을 위해 극심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들은 다가와 소학교 남쪽에 위치한 수용소와 공애료(共愛寮)라는 이름의 기숙사에 수용되었으며, 조선인 노동자들은 비좁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기초적인 생활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수용소에서는 기본적인 식량과 의료 지원도 충분하지 않았으며, 조선인 노동자들은 영양 부족과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더 나아가, 조선인 여성들 또한 강제로 동원되어 비참한 생활을 겪었다. 특히 ‘소송루(小松楼)’라는 시설에서는 조선인 여성이 성적 노예로 수용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곳에서 많은 여성들이 일본인 군인과 탄광 관리자들에게 성적 착취를 당했으며, 이들의 고통은 지금까지도 일본 내에서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상처로 남아 있다.
다가와 탄광에서의 조선인 강제 동원에 대한 연구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구체적인 피해 사례나 실태에 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기억하는 노력은 일부 이루어지고 있다. 1988년, 재일한국민단 다가와 지부와 한국인 징용 희생자 위령탑 건립 위원회에 의해 구 탄차 수리공장 터에 ‘한국인 징용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 위령비는 다가와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당하며 희생된 조선인들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일본 내에서 강제동원 역사를 상기하는 중요한 상징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다가와 탄광에서의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이러한 연구 부족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역사적 화해와 올바른 기억의 복원을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다가와 탄광에 대한 후속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고통과 역사가 온전히 조명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한일 양국 간의 역사적 갈등 해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출처: Google Map
※ 출처: 아오키 다쿠미,「旧筑豊工業(鉱山)高校が所蔵していた明治大正の炭坑写真」
참고문헌
- 青木琢美,「旧筑豊工業(鉱山)高校が所蔵していた明治大正の炭坑写真」,『エネルギー史研究 : 石炭を中心として』, 九州大学附属図書館付設記録資料館産業経済資料部門, 2013.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田川市 https://www.joho.tagawa.fukuoka.jp/kiji00351/index.html
- 田川市石炭·歴史博物館 https://www.joho.tagawa.fukuoka.jp/kiji00390/
- 飯塚観光協会 https://kankou-iizuka.jp/topic_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