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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케 탄광

개요

아카이케 탄광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아카이케 탄광 국가 / 지역 일본 / 후쿠오카현 후쿠치마치
현주소 후쿠오카현 후쿠치마치 아카이케 (福岡県 福地町 赤池)
강제동원 시설 탄광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메이지 광업 주식회사 (明治鉱業株式会社) 동원 방식 미상
현재 메이지 컨설턴트 주식회사 (明治コンサルタント株式会社) 피해 인원(추정) 약 7,000명

설명

역사

아카이케 탄광(赤池炭鉱)은 후쿠오카현 후쿠치마치(福智町) 일대에 위치했던 일본의 대표적인 석탄 채굴지 중 하나로, 그 역사는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12년, 현재의 후쿠치마치 다카오(高尾) 지구, 일명 보즈가다니(坊主ヶ谷)에서 한 승려에 의해 석탄이 처음 발견된 것이 아카이케 탄광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소규모의 채굴만 진행되었다. 특히 1868년, 메이지 유신 전후의 시기에 난굴(亂掘)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아카이케 지역에서의 석탄 채굴은 점차 확장되기 시작했다.

아카이케 탄광의 본격적인 개발은 1887년 ‘선정광구(選定鑛區)’ 제도가 도입되면서부터였다. 이 제도에 따라 아카이케 지역은 국가가 관리하는 광구로 지정되었으며, 1889년에는 야스카와 게이이치로(安川敬一郎)와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郎)가 이 광구를 인수하여 첫 번째 갱구의 개착(開鑿)에 착수했다. 그 결과, 1890년에 제1갱이 완성되었으나 초기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후 1903년, 제2갱의 개착이 시작되면서 광구 면적이 확장되었고, 채탄량도 크게 증가하였다.

1908년, 야스카와 게이이치로와 그의 아들을 중심으로 아카이케와 주변의 여러 탄광을 통합해 메이지 광업 주식합자회사(明治鉱業株式合資会社)를 설립하였다. 이는 일본의 석탄 산업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1919년에는 메이지 광업 주식회사(明治鉱業株式会社)로 재편되어 더욱 체계적인 운영이 가능해졌다.

아카이케 탄광의 운영 과정에서 가장 큰 사고 중 하나는 1935년에 발생한 가스 폭발 사고였다. 이 사고로 인해 83명이 사망하였으며, 이는 당시 일본 탄광에서 발생한 주요 사고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아카이케 탄광은 계속해서 확장되었으며, 1939년에는 도요쿠니 광업소(豊国鉱業所)를 편입시키며 사업 규모를 더욱 확대했다. 1944년에는 광부 3,853명을 고용하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일본 내에서 중요한 석탄 공급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석탄 산업의 불황과 일본의 경제 구조 변화로 인해 아카이케 탄광도 위기를 맞이했다. 1955년에 ‘석탄광업 합리화 임시 조치법’이 공포되면서 석탄 광업의 합리화와 함께 많은 탄광이 문을 닫게 되었고, 아카이케 탄광도 1958년을 끝으로 최종적으로 폐광되었다. 현재 후쿠치마치에는 당시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진혼비와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석탄 채굴 과정에서 사망한 이들의 구체적인 명단은 기록되지 않았으며, 후세에게 이 탄광의 역사를 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아카이케 탄광은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로 동원된 대표적인 탄광 중 하나였다. 다케우치 야스토(竹内康人)의 연구에 따르면, 1938년 6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아카이케 탄광으로 강제 연행된 조선인의 수는 5,242명에 달했다. 이 수치에 이후의 연행 예정자 수를 포함하면, 아카이케 탄광에 연행된 조선인은 총 7,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일본의 석탄 산업이 전쟁과 산업화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기 위해 조선인 노동력을 대규모로 동원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그러나 아카이케 탄광에서 강제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일본 정부는 탄광 노동자들을 강제적으로 동원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가했으며, 이는 당시 후쿠치마치에서 발행한 공보물 『広報あかいけ(광보 아카이케)』 2003년 12월호에도 강제 노동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을 정도로 공식적으로 은폐된 상태였다. 또한, 후쿠치마치에 세워진 진혼비와 충혼비 역시 사망자들의 구체적인 인명이나 조선인 강제 동원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1940년에 발간된 『반도인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에 따르면, 아카이케 탄광에서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인과 함께 협동 작업을 하도록 하여 ‘차별적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표면적으로는 주장하였다. 이 보고서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내지(일본 본토)인과 마찬가지로 임시 사택을 제공하고, 그들이 일본인과 섞여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은 실제로는 일본인 노동자들과 비교해 현저하게 열악한 조건에서 노동을 강요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탄광의 사례에서도 확인되듯이, 조선인 노동자들은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고, 일본 정부가 내세운 정책은 실질적으로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아카이케 탄광에서 ‘국체 정신’과 ‘협동 정신’을 함양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강제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위생 관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강제적으로 생활 습관을 바꾸도록 강요받았다. 또한, 이들은 ‘지적 작업’보다는 ‘단순 육체 노동’에 적합하다고 여겨져, 대부분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위험하고 힘든 중노동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내세운 ‘내지인과 같은 대우’라는 주장은 실제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조선인들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며 강제 노동을 이어갔다.

결론적으로, 아카이케 탄광은 일본의 석탄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장소였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 동원되어 고통받았다. 그들의 고통은 아직도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으며, 이 탄광에서 이루어진 강제 노동의 실태를 더욱 상세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연구와 자료 공개가 필요하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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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충혼비(2022년 11월) 충혼비(2022년 11월)

※ 출처: Google Map

진혼비(2022년 11월, 원 안) 진혼비(2022년 11월, 원 안)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日本鉱山協会,「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 1940.
  • 福智町 편, 『広報あかいけ』491, 福智町, 2003.
  •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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