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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쓰 탄광

개요

다카마쓰 탄광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다카마쓰 탄광 국가 / 지역 일본 / 후쿠오카현 온가군
현주소 후쿠오카현 온가군 미즈마키마치 (福岡県 遠賀郡 水巻町)
강제동원 시설 탄광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니혼 탄광 주식회사 (日本炭礦株式会社) 동원 방식 미상
현재 없음 피해 인원(추정) 약 10,000명

설명

역사

다카마쓰 탄광(高松炭鉱)은 일본 후쿠오카현에 위치한 대표적인 석탄 채굴지 중 하나로, 여러 광구(鑛區)를 기원으로 갖고 있다. 다카마쓰 탄광의 기원은 여러 개의 광구가 통합되면서 형성되었으며, 그 역사는 18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에 등록된 광구번호 1375호를 비롯해, 1898년에 개갱된 5116호와 6363호, 1903년 등록된 7231호, 1909년 등록된 604호 등의 광구가 다카마쓰 탄광의 기초가 되었다.

1910년에서 1911년 사이에 미요시 도쿠마쓰(三好徳松)가 이들 광구를 매수하여 광구번호 727호로 통합하면서 본격적인 석탄 채굴을 시작했다. 미요시는 1912년에 신규 갱도의 개착(開鑿)에 착수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석탄층에 도달하여 본격적인 채굴을 시작했다. 이후 1913년에는 사갱(斜坑) 개착에 착수하고, 1918년에는 미요시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광구번호 925호를 합병하였다. 이러한 확장에 따라 1919년, 미요시는 개인 경영이었던 다카마쓰 탄광을 미요시 광업 주식회사(三好鉱業株式会社)로 전환하여 회사 운영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1935년에는 니혼 탄광 주식회사(日本炭鉱株式会社)가 미요시 광업 주식회사를 매수하면서 다카마쓰 탄광은 ‘닛탄 다카마쓰(日炭高松)’로도 불리게 되었다. 니혼 탄광 주식회사 경영 하에 다카마쓰 탄광은 일본 지쿠호 탄전(筑豊炭田)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탄광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산업 구조 변화와 함께 석탄 수요가 감소하면서 1966년에 폐광하게 되었다. 다카마쓰 탄광의 폐광은 일본의 석탄 산업이 쇠퇴하는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사례였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다카마쓰 탄광은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연행되어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한 대표적인 현장 중 하나였다. 1944년 1월까지 다카마쓰 탄광으로 강제로 연행된 조선인은 7,681명에 달했으며, 1944년 1월부터 8월까지 추가로 1,411명이 연행되었다. 1945년 8월까지의 연행 숫자를 포함하면 총 10,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다카마쓰 탄광으로 강제로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일본의 전쟁 수행과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강제 동원되었으며,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인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1940년에 일본탄광협회가 발간한 보고서에서는 ‘일체의 복리 시설은 내지인(일본인)과 똑같이 하여 생활 조건의 향상에 유의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주장에 불과했고, 실제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생활하며 일해야 했다. 박경식(朴慶植)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인 징용공들은 매우 비좁고 열악한 기숙사에 수용되었다. 다다미 6장(약 11㎡) 정도의 작은 방에 6~7명이 함께 생활해야 했으며, 식사는 일본인 노동자들보다 훨씬 열악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차별적인 대우는 일본인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인들의 열악한 처우가 일본인 노동자들의 조건을 끌어내리는 역할을 했다는 증언도 남아 있다.

위의 증언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를 복원하면, 조선인 노동자들은 과도한 노동과 영양 부족으로 인해 신체가 쇠약해졌으며, 이로 인해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배가 고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운반차 사이에 끼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사고가 발생해도 상급자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비난하며 그들의 고통을 무시했다. ‘멍하게 행동하니까 이렇게 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노동자들을 비난하고, 민족적 차별감을 부추겼다고 한다. 또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들보다 훨씬 낮은 임금을 받았으며, 이러한 차별적 대우는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불평등을 야기했다.

또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작업이 끝난 후에는 종이로 된 옷을 입혀 통제되었다. 이들은 38~40도의 열이 있어도 노동에 투입되었으며, 사망자가 발생하면 광산 쓰레기와 함께 운반되어 ‘보타야마’라 불리는 쓰레기 산에 버려졌다는 충격적인 증언도 남아 있다. 이처럼 조선인 노동자들이 처한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으며, 일본 정부가 내세운 ‘생활 조건의 향상’이라는 주장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다카마쓰 탄광에서의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경제의 잔혹한 일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혹독한 노동과 차별 속에서 희생되었으며, 이들의 고통은 제대로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다카마쓰 탄광에서 벌어진 비인간적인 대우와 강제 노동의 실태는 오늘날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연구 과제로 남아있다.

사진

다카마쓰 탄광 위치 area_map_23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산쇼엔 입구(2022년 11월) 산쇼엔 입구(2022년 11월)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朴慶植,『朝鮮人強制連行の記録』, 未来社, 1965.
  •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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