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히라야마 탄광
개요
제목 | 히라야마 탄광 | 국가 / 지역 | 일본 / 후쿠오카현 게이센마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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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후쿠오카현 게이센마치 하지 (福岡県 桂川町 土師) | |||
강제동원 시설 | 탄광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메이지 광업 주식회사 (明治鉱業株式会社) | 동원 방식 | 미상 |
현재 | 메이지 컨설턴트 주식회사 (明治コンサルタント株式会社) | 피해 인원(추정) | 3,242명 |
설명
역사
히라야마 탄광(平山炭鉱)은 일본 후쿠오카현 노가타시(直方市) 일대에 위치했던 탄광으로,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정확히 언제 처음 석탄이 채굴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에도시대에 해당하는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채굴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일본 내에서 석탄이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히라야마 탄광이 오랜 역사를 지닌 채굴지임을 보여준다.
근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개발은 1895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히젠(肥前) 지역 출신의 광업인 마쓰오 노리모토(松尾法幹)가 히라야마 지역에서 첫 개착(開鑿)을 시도하며, 석탄 채굴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1902년에는 구마가이 료조(熊谷良三)가 명의를 이어받아 운영을 계속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히라야마 탄광 주식회사(平山炭鉱株式会社)로 회사가 설립되어 더욱 큰 규모의 채굴이 가능해졌다.
1930년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대표적인 광업 기업 중 하나였던 메이지 광업 주식회사(明治鉱業株式会社)가 히라야마 탄광을 매수하며 이 지역 석탄 자원의 개발을 확대했다. 1931년에는 히라야마 광업 주식회사(平山鉱業株式会社)를 설립하여 더욱 체계적인 석탄 채굴이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채굴된 석탄은 일본 내 주요 산업 중심지인 수도권과 관서 지역으로 수송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으로도 수출되었다. 히라야마 탄광은 일본의 산업화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원 공급지로 성장했으나, 결국 일본의 석탄 산업 쇠퇴와 함께 1972년에 폐광되었다.
히라야마 탄광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현재 후쿠오카현 노가타시에는 노가타시 석탄기념관(直方石炭記念館)이 설립되어 있다. 이 기념관에는 히라야마 탄광 사업소의 간판이 전시되어 있으며, 탄광이 있었던 지역의 역사와 발전 과정을 후세에 전달하고 있다. 기념관은 탄광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삶과 지역 사회에 끼친 영향을 되새기는 중요한 장소로, 방문객들이 당시 일본의 석탄 산업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히라야마 탄광 역시 일본의 다른 주요 탄광들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강제 노동을 당한 장소였다. 다나카 나오키(田中直樹)의 연구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히라야마 탄광에는 총 3,242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로 연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수치는 당시 일본의 석탄 산업이 전쟁과 산업화에 필수적인 자원을 공급하기 위해 조선인 노동력을 대규모로 동원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히라야마 탄광의 ‘기숙사생 명부(寮生名簿)’에는 597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기록되어 있다고 전해지며, 이들은 주로 탄광 인근에 위치한 열악한 기숙사에 강제로 수용된 상태에서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았다. 규슈대학(九州大学)의 부속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문서에 따르면, 히라야마 탄광에서 동원된 조선인에 관련된 자료가 소장되어 있으나, 현재로서는 이러한 사료들이 공개되지 않고 있어, 조선인 노동자들이 겪은 구체적인 실태를 더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연구와 자료 공개가 필요하다.
1940년에 일본탄광협회에서 발간한 『반도인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半島人勞務者ニ關スル調査報告)』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히라야마 탄광을 포함한 여러 탄광에서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내지동화(內地同化)라는 명목 아래 일본 문화를 강요했다. 이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인과 동일하게 대우받는 것처럼 표면적으로는 포장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많은 차별과 강압적인 동화를 요구했다. 보고서에서는 일본인 광부가 조선인 노동자들을 ‘골육의 정애(骨肉の情愛)’로 지도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주장에 불과했다.
히라야마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매주 1회의 훈화와 일본식 풍속 교육을 강제로 받아야 했으며, 하루 1시간씩 일본어 교육을 받아 일본 문화를 습득하도록 강요받았다. 또한, 창씨개명을 장려하며 조선인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은 매일 아침 황국신민의 선서를 강제로 낭독해야 했고, 일요일 오후에는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제되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 노동자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억누르고, 일본 제국에 충성을 강요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2년 계약으로 히라야마 탄광에 배치되었으며, 임금은 처음 3개월간 내지인 미경험 노무자의 초급 임금을 기준으로 받았다. 이들은 초기 두 달 동안 2엔 50전에서 2엔 70전의 임금을 받았으며, 3개월째가 되면 노동 기량에 따라 적절한 증액이 이루어진다고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은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 노무에 주로 배치되었으며,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임금을 받았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단순한 노동력으로만 착취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히라야마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았고, 차별적인 대우 속에서 인권을 침해당했다. 이들이 겪은 고통은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와 억압의 역사적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며, 아직도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사료 공개가 절실히 필요하다.
사진
※ 출처: Google Map
※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日本鉱山協会,「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 1940.
- 明治鉱業株式会社社史編纂委員会 편,『社史明治鉱業株式会社』, 明治鉱業株式会社,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