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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카노오 탄광

개요

샤카노오 탄광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샤카노오 탄광 국가 / 지역 일본 / 후쿠오카현 이즈카시
현주소 후쿠오카현 이즈카시 고타케마치 니다 (福岡県 飯塚市 小竹町 新多)
강제동원 시설 탄광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후루카와 광업 주식회사 (古河鉱業株式会社) 동원 방식 미상
현재 후루카와 기계 금속 (古河機械金属) 피해 인원(추정) 약 3,000명

설명

역사

샤카노오 탄광(目尾炭鉱)은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1872년 아소 다키치(麻生太吉)에 의해 개광된 중요한 탄광으로, 일본 석탄 산업의 초기 발전에 기여를 한 탄광 중 하나이다. 초기에는 기술적 한계로 인해 채굴이 어려워 일시적으로 운영이 중단되는 일도 있었으나, 1880년 스기야마 도쿠사부로(杉山徳三郎)가 이 탄광을 인수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스기야마는 1881년 일본 최초로 증기기관을 도입하여 기계적 채탄을 성공시켰으며, 이를 통해 샤카노오 탄광은 일본 석탄 산업의 근대화에 있어 상징적인 탄광이 되었다.

특히 샤카노오 탄광에서는 증기기관을 사용한 펌프를 도입하여 지하수 문제를 해결하고 채굴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일본 석탄 산업에서 큰 혁신이었으며, 탄광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크게 높여 일본의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샤카노오 탄광은 이러한 기술 혁신을 통해 일본 내에서 근대적 석탄 채굴의 모범 사례로 자리 잡았고, 일본 석탄 산업 발전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1896년, 일본의 유력 광산업자 후루카와 시베에(古河市兵衛)가 샤카노오 탄광을 인수한 이후 탄광은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후루카와의 경영 하에 샤카노오 탄광은 1917년에 연간 50만 톤 이상의 석탄을 생산하는 일본 최대 규모의 탄광 중 하나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는 일본의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시기였으며, 철도, 선박, 철강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석탄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샤카노오 탄광에서 채굴된 석탄은 일본 내 산업에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영향력은 일본 국내외로 확대되었다.

샤카노오 탄광의 석탄 운송은 초기에는 강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1894년 철도 노선이 개통되면서 운송은 훨씬 더 효율적으로 변화하였다. 이 철도망은 샤카노오 탄광의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 내 석탄 수요 증가와 맞물려 탄광의 경제적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일본의 산업 구조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샤카노오 탄광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탄광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샤카노오 탄광의 출탄량은 점차 감소하였다. 이는 일본의 여러 탄광이 겪었던 공통적인 문제로, 석탄 자원의 한계와 기술적 발전의 한계가 맞물린 결과였다. 결국 1929년 6월, 샤카노오 탄광은 채굴 작업을 중단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탄광의 역사적 중요성은 여전히 높게 평가되었으며, 2018년에는 일본 정부에 의해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샤카노오 탄광은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로 동원된 현장 중 하나였다. 연구에 따르면, 샤카노오 탄광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수는 약 3,000명에 달했다. 이들은 대부분 1930년대 말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전쟁 수행과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강제 연행되었으며,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한 노동을 강요받았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과 희생은 1994년에 세워진 추모비(岩松菩提)에 기록되어 있다. 추모비에는 대규모 자본가들이 이익을 추구하면서 안전성을 경시했으며, 전시하에 젊은 조선인들이 강제 연행되어 위험한 작업에 종사하게 되었다는 점이 기재되어 있다.

1940년에 발간된 일본 탄광 협회의 보고서에는 ‘갱내 작업 및 모든 행사, 일상생활에서 조선인에게 어떠한 차별 대우도 하지 않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보고서에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 ‘도주자 및 악질 인원을 제외하면 대략 양호하다’고 언급한 부분에서, 이들이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일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도주를 시도하거나 강제 동원을 피하려 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며, 또한 보고서에서 조선인의 "민족성"에 대해 일반적인 위생 사상이 좋지 않다는 차별적 인식이 드러난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지 않았음을 시사하며, 그들이 겪었던 차별과 억압을 보여준다.

샤카노오 탄광에서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교육을 철저히 실시했다. 일본 정부는 공휴일 등을 이용해 훈육 교련, 행군, 견학 등을 시행하며, 이 교육을 통해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매일 아침에는 ‘황국신민의 서약’을 낭독하게 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일본식 생활방식을 강요하였다. 1940년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조선 음식을 제공했으나, 점차 일본 음식으로 내지화(内地化)할 계획을 세웠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에 대해 보고서에서는 쌀 배급에 대한 보조, 주택 지원, 보조금 등의 혜택을 명시했지만, 이들이 실제로 일본인 노동자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는지는 의문이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일본인 노동자들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신체적 안전과 건강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 노동을 이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에서 언급된 계약 조건은 2년이었으나, 강제 동원이라는 맥락을 고려할 때 이들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도 자유롭게 떠날 수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방적인 계약과 착취 속에서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노동을 강요당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샤카노오 탄광에서의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경제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차별과 억압을 경험했으며, 이들의 희생은 당시 일본의 산업 발전을 위해 무시된 채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샤카노오 탄광에서 벌어진 강제 노동의 실태는 계속해서 연구되고 조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사진

샤카노오 탄광 위치 area_map_21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샤카노오 탄광(1901년경) 샤카노오 탄광(1901년경)

※ 출처: 『古河鉱業西部工業所20周年記念写真帳』(『史跡筑豊炭田遺跡群保存活用計画- 目尾炭坑跡編 -』)에서 재인용.

샤카노오 탄광(1916년경) 샤카노오 탄광(1916년경)

※ 출처: 『古河鉱業西部工業所20周年記念写真帳』(『史跡筑豊炭田遺跡群保存活用計画- 目尾炭坑跡編 -』)에서 재인용.

추모비(2018년 9월) 추모비(2018년 9월)

※출처: Google Map
 

참고문헌

  • 飯塚市教育委員会,『史跡筑豊炭田遺跡群保存活用計画- 目尾炭坑跡編 -』, 飯塚市教育委員会, 2021.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日本鉱山協会,「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 1940.
  • 飯塚市/飯塚市デジタルミュージアム https://adeac.jp/iizuka-city/top/
  • 飯塚歴史博物館 https://www.city.iizuka.lg.jp/reki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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