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강제동원
다다쿠마 탄광
개요
제목 | 다다쿠마 탄광 | 국가 / 지역 | 일본 / 후쿠오카현 이즈카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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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 | 후쿠오카현 이즈카시 오아자 다다쿠마 (福岡県 飯塚市 大字 忠隈) | |||
강제동원 시설 | 탄광 | 피해 유형 | 노무자 | |
관련 기업·기관 |
과거 | 스미토모 합자회사 (住友合資会社) | 동원 방식 | 미상 |
현재 | 스미토모 금속 광산 (住友金属鉱山) | 피해 인원(추정) | 약 4,000명 |
설명
역사
다다쿠마 탄광(忠隈炭鉱)은 일본 후쿠오카현에 위치한 지쿠호 탄전(筑豊炭田) 지역의 대표적인 탄광 중 하나로, 1885년 아소 다키치(麻生太吉)에 의해 개광되었다. 이 탄광은 일본의 급속한 산업화와 석탄 수요 증가에 힘입어 중요한 석탄 공급지로 성장하게 되었으나, 자연재해와 기술적 한계로 인해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1891년과 1892년에 연이어 발생한 폭우로 인해 다다쿠마 탄광은 심각한 수해를 입었다. 1892년의 폭우는 지쿠호 탄전 지역 전반에 큰 피해를 안겼으며, 당시 30개 이상의 탄광이 휴광되었고, 16개의 탄광이 폐광될 정도로 탄광 산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다쿠마 탄광 또한 이 폭우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배수 작업 중이던 광부들이 산사태에 휘말려 6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쿠마 탄광은 수해 이후에도 채굴 작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탄광 내부의 대단층(大断層)에 부딪혀 새로운 광맥을 찾지 못하고 채굴량이 급감하면서 탄광은 심각한 경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자금난을 겪고 있던 아소 다키치는 대자본을 가진 스미토모 그룹에 탄광을 매각하게 되었다. 1894년 4월, 스미토모는 10만 8천 엔이라는 거액을 지불하고 다다쿠마 탄광을 인수하였다.
스미토모는 인수 후 아소 다키치가 추진하던 기계화를 지속적으로 도입해 주요 갱도를 확장하였고, 채굴이 어려웠던 삼척층(三尺層)의 석탄도 채굴하기 시작했다. 특히, 1894년부터 시작된 청일 전쟁으로 인해 일본의 석탄 수요가 급증하면서, 다다쿠마 탄광은 경영 안정화를 이룰 수 있었다. 스미토모의 경영 하에 다다쿠마 탄광은 일본 석탄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후 약 70여 년간 운영되었다.
그러나 다다쿠마 탄광의 역사는 비극적인 사고들로 얼룩져 있었다. 1911년 6월 1일에는 석탄먼지와 가스 폭발로 인해 73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였으며, 1932년에도 가스 폭발로 인해 18명이 사망했다. 1936년 4월 15일에는 인차(人車) 사고로 인해 57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고, 1949년과 1952년에도 각각 15명과 5명이 붕괴 사고로 사망하는 등 지속적인 사고가 탄광을 괴롭혔다.
결국, 1961년 9월 30일 다다쿠마 탄광은 폐광되었고, 그 후에도 다다쿠마 탄광 주식회사(忠隈炭鉱株式会社)가 운영을 이어갔으나, 1965년 8월 20일 광업권을 포기하면서 탄광은 완전히 폐쇄되었다. 다다쿠마 탄광은 일본의 산업화와 전쟁 경제에 중요한 자원을 제공한 곳으로,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비극을 동반한 탄광이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다다쿠마 탄광은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한 대표적인 탄광 중 하나였다. 연구에 따르면, 1944년 1월까지 다다쿠마 탄광으로 강제 연행된 조선인의 수는 3,018명으로 확인되며, 1945년 5월까지 추가로 약 1,000명이 연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의 전쟁 수행과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강제 동원되었으며,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다.
다다쿠마 탄광에서 채굴 후 버려지는 돌이나 질 낮은 석탄은 ‘보타(ボタ)’라고 불렸으며, 탄광에서 쌓인 이 보타가 산처럼 높아지면서 ‘보타야마(ボタ山)’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다쿠마 탄광에서 형성된 보타야마는 높이 124미터에 달했으며, 그 산기슭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묘지가 존재했다. 1960년대 초반, 이 지역에서 50여 개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나, 현재까지 절반 정도만이 남아 있다. 이 묘지들은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 속에서 희생된 결과를 보여주는 증거로 남아 있다.
다다쿠마 탄광에서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 중 사망한 사람들의 명부는 일본 측에서 기록되었으나, 그들의 이름은 대부분 미상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그들은 신원이 명확히 기록되지 않은 채 비참한 삶을 마감했으며, 이러한 처우는 일본 내에서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겪은 차별적 대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다다쿠마 탄광에서의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는 일본의 전쟁 경제와 산업화 과정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오늘날 이러한 역사는 제대로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하며,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고통과 희생은 잊혀져서는 안 될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다.
사진
※ 출처: 이즈카시/ 이즈카 디지털 뮤지엄
※ 출처: 이즈카시/ 이즈카 디지털 뮤지엄
※ 출처: 이즈카시/ 이즈카 디지털 뮤지엄
※ 출처: 아오키 다쿠미,「旧筑豊工業(鉱山)高校が所蔵していた明治大正の炭坑写真」
참고문헌
- 青木琢美,「旧筑豊工業(鉱山)高校が所蔵していた明治大正の炭坑写真」,『エネルギー史研究 : 石炭を中心として』, 九州大学附属図書館付設記録資料館産業経済資料部門, 2013.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飯塚観光協会ホームページ https://kankou-iizuka.jp/topic_15/
- 飯塚市/飯塚市デジタルミュージアムホームページ https://adeac.jp/iizuka-city/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