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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즈타 탄광

개요

나마즈타 탄광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나마즈타 탄광 국가 / 지역 일본 / 후쿠오카현 이즈카시
현주소 후쿠오카현 이즈카시 나마즈타 504-6 (福岡県 飯塚市 鯰田 504-6)
강제동원 시설 탄광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 (三菱鉱業株式会社) 동원 방식 미상
현재 미쓰비시 머티리얼 (三菱マテリアル株式会社) 피해 인원(추정) 약 4,000명

설명

역사

나마즈타 탄광(鯰田炭鉱)은 일본의 메이지 시대 중반에 개갱되어, 이후 일본의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탄광 중 하나다. 1880년 11월, 다테이와무라(立岩村)의 아소 요시로(麻生賀郎)는 아들 다키치(太吉)의 명의로 3,500평 규모의 나마즈타 탄광을 처음 개갱(開坑)하였다. 다키치는 훗날 일본의 정치가 아소 다로(麻生太郎)의 증조부로, 이 탄광은 아소 가문의 산업 기반을 구축한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증기기관 운용 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1885년경 운영이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미쓰비시가 이 탄광을 주목하게 된다. 야스카와 게이이치로(安川敬一郎)와 히라오카 고이치로(平岡浩一郎)의 중재로, 미쓰비시는 1889년에 나마즈타 탄광을 인수하여 본격적인 조업을 재개했다. 미쓰비시는 당시 일본 전역의 산업화를 선도하는 대기업으로, 나마즈타 탄광을 통해 북규슈 지역의 석탄 채굴 산업을 더욱 확장할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이즈카시(飯塚市)를 중심으로 가이타마치(頴田町), 쇼나이마치(庄内町), 이나쓰키마치(稲築町) 등 주변 지역에 걸쳐 총 6개의 갱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일본 산업 발전에서 중요한 석탄 공급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마즈타 탄광은 1918년 4월 미쓰비시 광업(三菱鉱業)의 발족과 함께 더 체계적인 운영이 이루어졌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나마즈타뿐만 아니라 신뉴(新入), 호조(方城), 가미야마다(上山田) 등 인근 광산들이 지쿠호 광업소(筑豊工業所)로 통합되었고, 이는 당시 일본의 석탄 산업의 중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50년 5월 지쿠호 광업소가 폐지되면서 나마즈타는 독립적인 광업소로 재편되었고, 이후 1962년에 기구 축소가 이루어진 뒤 최종적으로 1970년 탄광이 폐산되면서 일본의 탄광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나마즈타 탄광은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된 대표적인 현장 중 하나로,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에서 강제 노역을 당했다. 특히, 나마즈타 소학교(鯰田小学校) 부근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수용소가 있었으며, 인근 가모오(鴨生) 지역에도 조선인들의 집락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의 작은 구릉지는 조선인들에 의해 ‘아리랑 고개’로 불렸으며, 이는 당시 강제노동을 당하던 조선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상징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1946년 일본 후생성 근로국이 조사한 명부에 따르면, 제3갱을 중심으로 3,051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름과 출신지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나마즈타 탄광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전부를 대표하지 않으며, 실제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수는 4,000명을 훨씬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조선인들은 주로 강제 계약에 따라 2년 동안 노동에 투입되었으며, 극도로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을 해야 했다.

1940년에 발간된 일본 광산 협회의 보고서 『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에 따르면, 나마즈타 탄광은 ‘내지동화’ 정책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일본 문화를 강요했다. 이들은 조선인들이 언어, 풍습, 음식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인들과 동화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위해 매주 1회의 훈화 및 풍속 예의 지도를 실시하였다. 또한 하루 1시간씩 일본어 교육을 강제하는 한편, 창씨개명을 장려하며 조선인들의 정체성을 억압했다. 나아가 ‘단체훈련교화’라는 명목으로 매일 1시간씩 부동자세, 경례, 집합과 해산 등의 훈련을 시켰으며, 이는 조선인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하거나 탈출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조선인들은 매일 아침 황국신민의 선서를 낭독하고, 일요일 오후에는 신사참배를 강요받았다. 이는 일본 정부가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억누르고 일본 제국에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일해야 했으며, 그들의 노동 환경은 대단히 비참했다.

임금 문제에서도 조선인들은 차별을 당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계약 초기 3개월 동안 내지인 미경험 노동자의 초급 임금을 받았으나, 이 금액은 약 2엔 50전에서 2엔 70전으로 극히 낮았다. 이후에도 조선인들은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작업에 주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해야 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단순히 값싼 노동력으로 착취당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사례다.

나마즈타 탄광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광업의 정책적 차별 속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과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해야 했다. 이들이 겪은 고통은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식민 지배와 경제 착취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사진

나마즈타 탄광 위치 area_map_18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나마즈카 탄광 터와 비석(2022년 6월) 나마즈카 탄광 터와 비석(2022년 6월)

※ 출처: Google Map

나마즈타 탄광 내부(1900년대 초) 나마즈타 탄광 내부(1900년대 초)

※ 출처: 아오키 다쿠미,「旧筑豊工業(鉱山)高校が所蔵していた明治大正の炭坑写真」

참고문헌

  • 青木琢美,「旧筑豊工業(鉱山)高校が所蔵していた明治大正の炭坑写真」,『エネルギー史研究 : 石炭を中心として』, 九州大学附属図書館付設記録資料館産業経済資料部門, 2013.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日本鉱山協会,「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 1940.
  • 飯塚市/飯塚市デジタルミュージアム https://adeac.jp/iizuka-city/top/
  •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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