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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우라 탄광

개요

오노우라 탄광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오노우라 탄광 국가 / 지역 일본 / 후쿠오카현 미야와카시
현주소 후쿠오카현 미야와카시 가미오쿠마 (福岡県 宮若市 上大隈)
강제동원 시설 탄광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가이지마 광업 주식회사 (貝島鉱業株式会社) 동원 방식 미상
현재 없음 피해 인원(추정) 약 10,000명

설명

역사

오노우라 탄광(大之浦炭鉱)은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탄광 중 하나로, 후쿠오카현 지쿠호(筑豊) 지역에서 석탄 채굴을 시작한 이래 일본의 대표적인 석탄 공급지로 자리 잡았다. 이 탄광은 ‘지쿠호의 석탄왕’으로 불린 가이지마 다스케(貝島太助)에 의해 1884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가이지마는 당시 오야마다 진페이(小山田甚平)가 소유하고 있던 가미오쿠마(上大隈) 일대의 차구(借区) 3,700평을 매수하여 1885년 4월, 광구 출원을 하며 오노우라 탄광의 역사를 열었다.

가이지마는 같은 해에 수직갱의 개착(開鑿)을 시작하였고, 1896년 3월에 석탄층에 도달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석탄 채굴이 시작되었다. 이후 1888년, 가이지마는 인근 스가무타(菅牟田)에 43,600평의 광구를 추가로 매수하여 오노우라 광구와 합병하였고, 이 광구는 ‘오노우라 2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를 통해 탄광의 채굴 범위와 규모를 더욱 확장하게 되었으며, 오노우라 탄광은 일본 석탄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석탄 산업은 20세기 중반에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와 함께 석탄의 수요가 감소하면서 오노우라 탄광도 경영난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1968년에는 ‘미쓰노우라 탄광(満之浦炭鉱)’이라는 이름으로 최종 폐광하게 되었다. 오노우라 탄광의 폐광은 일본 석탄 산업이 쇠퇴하는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일어난 것이며, 이는 일본의 에너지 수요가 석탄에서 다른 자원으로 변화하는 시기를 반영하고 있다.

한편, 미야와카시 내에 있는 센고쿠 공원(千石公園)에는 1982년에 ‘탄광 희생자 복권의 탑’이 건립되었다. 이 탑은 탄광에서 희생된 노동자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오노우라 탄광을 비롯한 지쿠호 지역 탄광의 역사적 유산을 기억하기 위한 중요한 상징물이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오노우라 탄광은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된 대표적인 탄광 중 하나였다. 연구에 따르면, 오노우라 탄광에 강제로 연행된 조선인의 수는 10,000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 1월까지 확인된 조선인 강제 연행자는 7,930명이며, 1945년 8월까지 추가로 2,000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연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일본이 전쟁 수행과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규모로 조선인 노동력을 동원한 결과다.

오노우라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동원은 이미 1917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강제 동원의 전사(前史)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유물로는 미야와카 시청에 위치한 송덕비와 사은비가 있다. 1929년에 세워진 송덕비는 오노우라 탄광 제7갱의 갱장 다와라구치 가즈이치로(俵口和一郎氏)의 퇴직을 기념하며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조선인들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1935년에 세워진 사은비는 오노우라 제7갱의 표면 채굴(Surface mining)이 종료되며 조선인 노동자들이 가이지마 광업 주식회사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석들은 표면적인 감사의 표현일 뿐, 조선인 노동자들이 겪었던 실질적인 차별과 억압을 간과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1940년에 발간된 『반도인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에서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내지인(일본 본토인)과 동일하게 대우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방침에 불과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오노우라 탄광에서는 50명당 1명꼴로 조선어를 이해할 수 있는 전임 지도자(일본인)와 보조원(일본어가 가능한 조선인)을 두어 조선인들에게 내선융화(內鮮融和) 교육을 철저히 시행했다고 한다. 주 2회 간담회를 열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사택에서 함께 생활하도록 했으며, 귀환 병사 환영회 등에도 조선인들을 동원했다고 보고서는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대우와는 달리, 실제로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심각한 차별과 억압을 경험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오노우라 탄광에서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사고가 천박하고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편견 속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 또한, 조선인들은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으며, 일본 정부의 내선융화 정책은 단순히 노동력을 통제하고 동화시키려는 방편에 불과했다. 표면적인 ‘차별 없는 대우’라는 방침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은 혹독한 노동 환경 속에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오노우라 탄광에서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의 전쟁과 경제를 위해 착취된 수많은 조선인들의 일부였다.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강제 동원 정책 하에서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며 많은 희생을 치렀다. 오노우라 탄광에서 벌어진 이러한 강제 동원과 차별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연구 과제로 남아 있으며,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과 희생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진

오노우라 탄광 위치 area_map_16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탄광 희생자 복권의 탑 1(2023년 12월) 탄광 희생자 복권의 탑 1(2023년 12월)

※ 출처: Google Map

탄광 희생자 복권의 탑 2(2023년 12월) 탄광 희생자 복권의 탑 2(2023년 12월)

※ 출처: Google Map

가이지마 탄광의 발상지를 가리키는 비석(2023년 6월) 가이지마 탄광의 발상지를 가리키는 비석(2023년 6월)

※ 출처: Google Map

오노우라 탄광 기리노갱(桐野坑) 전경(1907년경) 오노우라 탄광 기리노갱(桐野坑) 전경(1907년경)

※ 출처: 아오키 다쿠미,「旧筑豊工業(鉱山)高校が所蔵していた明治大正の炭坑写真」

참고문헌

  • 青木琢美,「旧筑豊工業(鉱山)高校が所蔵していた明治大正の炭坑写真」,『エネルギー史研究 : 石炭を中心として』, 九州大学附属図書館付設記録資料館産業経済資料部門, 2013.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日本鉱山協会,「半島人労務者に関する調査報告」,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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