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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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치 탄광

개요

소라치 탄광 개요:제목, 국가 / 지역, 지역 정보, 현주소, 강제동원 시설, 관련 기업·기관(과거, 현재) 피해 유형, 동원방식, 피해 인원(추정)에 대한 표
제목 소라치 탄광 국가 / 지역 일본 / 홋카이도 우타시나이시
현주소 홋카이도 우타시나이시 (北海道 歌志内市)
강제동원 시설 탄광 피해 유형 노무자
관련
기업·기관
과거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 (北海道炭礦汽船株式会社) 동원 방식 모집, 관알선, 징용
현재 상동 피해 인원(추정) 약 7,000명

설명

역사

소라치 탄광(空知炭鉱)은 홋카이도 우타시나이시(歌志内市)에 있었던 탄광이며 1890년에 조업을 시작했다.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가 운영을 하다가 자회사인 소라치 탄광 주식회사(空知炭鉱株式會社)가 1963년부터 운영했다.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가 운영하던 마지막 탄광으로 1995년에 폐광했다.

조선인 강제 동원 실태

다케우치가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소라치 탄광에는 1944년 5월까지 조선인 4,975명이 강제동원되는 등 약 7,000여 명의 조선인들이 노역을 했고, 나가사와는 4,975명이 강제동원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인 1945년 6월 말에는 2,648명의 조선인들이 소라치 탄광에 남아 있었다.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는 1939년부터 1942년 6월까지 할당 모집으로 조선인을 강제동원했고,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관알선을 통해 소라치 탄광 등으로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다. 소라치 탄광은 할당 모집을 통해 1939년에 483명, 1940년에 700명, 1941년에 739명, 1942년에 229명 등 총 2,151명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다. 이와 함께 관알선을 90회 요청했고, 홋카이도청(北海道廳)은 37,019명을 승인했다.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24,248명을 승인했고, 군 인계 인원은 3,689명이었다. 1942년 8월 10일부터 1945년 6월 12일까지 3,572명의 조선인들이 소라치 탄광으로 향했고, 도중에 탈출한 198명을 제외하고 소라치 탄광에 도착한 조선인은 3,349명이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홋카이도 탄광기선 주식회사가 운영하는 탄광에서 저항 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총 24번의 저항 활동이 있었다. 저항의 형태는 파업 11회, 항쟁 8회, 태업 3회, 진정 1회, 시위 1회였고, 저항의 이유로 노무관리 5회, 민족차별 5회, 식사 4회, 임금 3회, 보안 3회, 귀국 요구 3회, 날씨 1회였다. 소라치 탄광의 경우 1번의 저항 활동이 있었다.

사진

소라치 탄광 위치 area_map_13

※ 출처: Google Map을 바탕으로 필자 작성

소라치 탄광 강제동원 피해자가 제공한 단체 사진 소라치 탄광 강제동원 피해자가 제공한 단체 사진

※ 출처: 국무총리실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강제동원기록총서1–강제동원명부해제집1』, 2009, p.36.

참고문헌

  • 국무총리실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강제동원기록총서1–강제동원명부해제집1』, 2009.
  • 노영종,「일제 말기 충남지역 노동력 강제동원과 거부투쟁」, 충남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9.
  • 朝鮮人強制連行真相調査団編,『朝鮮人強制連行強制労働の記録-北海道·千島·樺太篇』, 現代史出版会, 1974.
  • 竹内康人,『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① 炭鉱編』, 社会評論社, 2013.
  • 長澤秀,「資料-北炭と朝鮮人強制連行」,『史苑』56, 1995.
  • 朝鮮人強制連行深層調査団編,『朝鮮人強制連行強制労働の記録-北海道·千島·樺太篇』, 現代史出版会, 1974.
  • 守屋敬彦,「第二次世界大戰下における朝鮮人强制連行の統計的硏究-被連行者數について-」,『首都大學紀要』13, 1994.
  • コトバンクホームページ https://kotobank.jp/
  • 北海道文化資源データベースホームページ https://www.northerncross.co.jp/bunkashigen/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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