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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12월] 포모의 소장자료 소개 '충량한 황국 병사를 육성하는 -조선인 특별지원병 제도 -'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2024-11-29 231

충량한 황국 병사를 육성하는 

-조선인 특별지원병 제도 -



조선인 육군지원병 훈련개시[구입14]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 훈련소 입소를 보도한 동맹뉴스 제6271938[昭和13]1020(). 1938년 조선육군지원병제도가 실시되어 제1기 훈련생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게재됨.


조선인 병력동원의 시작 특별지원병제

193777일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병력 충원을 위해 같은 해 12월에 육군특별지원병 제도의 시행을 결정한다. 이듬해 2월에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제정·공포하고, 이후 시행세칙과 훈련소 관제 등 관련 법령이 규정되면서 193843일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었다.

육군특별지원병제도는 조선인 중 조선총독부육군지원병훈련소(이하 지원병훈련소)의 과정을 수료한 후 일본군 현역 또는 제1보충병으로 입대하는 것이다. 이 제도를 통해 1938년부터 1943년까지 모집된 지원자는 총 802,047명이었으며, 이 중 16,830명의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지원병 모집과정은 다음과 같다. 조선군사령관이 지원병으로 편입할 일본군 현역 또는 제1보충병역의 정원 및 입영부대에 관한 의견을 육군대신에게 보고하면, 육군대신은 천황에게 재가를 받은 후 다시 조선군사령관에게 전달하였다.

이를 근거로 총독부가 동원계획에 따라 각 도에 지원병 편입 인원을 할당하고, 도지사는 각 도 관할 경찰서장이 접수받은 할당 인원을 지원병훈련소장에게 추천하였다. 이후 지원병훈련소장은 각 도에서 추천된 인원에 대해 육군신체검사규칙에 따라 검사를 실시하고 채용여부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모집 과정을 통해 지원병 제도의 강제동원적 성격을 볼 수 있으며, 조선인 지원병제도는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시키기 위한 시험적인 성격의 제도이자, 향후 징병제를 실시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황군(皇軍)으로 양성되는 조선인 청년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특별지원병제를 통해 전방에서는 조선인을 전선(戰線)의 황국군인(皇國國人)”으로 동원하고, 후방에서는 조선인에게 총후(銃後)의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자격을 강요하는데 활용하였다. . 지원병제도 실시와 더불어 많은 조선인을 전쟁에 참가시키기 위해 선전활동과 사상통제도 병행한 것이다.

지원병 모집과정에서 총독부 학무국이 지원병 추천자 모집 및 관련 사무를 담당하였는데, 당시 학무국장이 육군특별지원병훈련소의 소장을 겸임하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이사장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산하 조직망을 이용해 실질적으로 지원병 모집활동을 했던 조직이라는 것이다. 각 도 연맹은 지원병모집운동을 전개하여 말단인 애국반까지 모집 인원을 할당하고, 좌담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나아가 지원병후원회와 협력하여, “가정의 생활을 보장해준다.”, “일등국민이 되어라.”는 식의 설득과 회유를 했다. 1930년대 열악한 농촌 사정으로 인해 극도로 궁핍해진 지원자들은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일제가 강제와 회유라는 방식으로 조선인이 지원병으로 자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형성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비극 속에 만들어진 전쟁영웅

총독부는 일본의 전쟁의 신(軍神)’ 사례를 참고하여, 조선에서도 전쟁영웅을 만들고, 전쟁 참여를 위한 선전도구로 활용하였다. 각종 전쟁미담을 교과서로 만들어 학교 교육의 현장에서 가르치고, 신문이나 잡지 등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홍보하는 등 선전에 열을 올렸다.

조선인 지원병 출신의 전쟁영웅으로는 대표적으로 이인석(李仁錫)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최초의 지원병 전사자로 일제가 가장 적극적으로 선전에 활용한 인물이었다. 일제는 이인석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전사하였다며, 전쟁영웅으로 추앙하였으며, 조선인 최초 금치훈장(金鵄勲章, 육해군 군인 군속 대상 훈장) 수여와 특진, 유가족에 대한 원호(援護) 등 화려하게 대우하고 선전했다.

이후 이인석에 대한 영웅화 작업은 영화, 소설, 시 등 문예작품과 강연회, 전시회 등의 행사를 통해 많은 조선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일제의 대중선동에는 일부 조선인 엘리트들도 앞 다투어 협력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이인석 전쟁영웅화 작업과 선전은 조선사회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인석의 전사소식이 전해지자 각지에서는 약 천 여명이 넘는 조문객 행렬이 이어졌으며, 더불어 많은 금액의 조의금 모금이 이뤄졌다.

한편 이인석을 선전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에 반발하여 저항한 사례도 있었다. 당시 옥천군수 최병협이 경성일보에 이인석의 죽음을 치하하는 기사를 기고하였는데, 이에 대해 이인석과 같은 고향 출신인 유재혁이 분개하여 협박문을 보낸 것이다.

협박문의 내용을 보면, ‘늙은 부모와 처자를 두고 빈궁한 생활형편을 걱정하던 이인석에게 희생을 강요하여 전장에 보낸 점, ‘일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성일보에 기사를 실은 점, ‘조선청년이 일본 때문에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뻐한 점을 들어 만족도 모르고 동포도 모르는 자라고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유재혁은 체포되었고, 대전형무소에서 15개월 간 복역하였다.

이러한 저항은 만들어진 전쟁영웅의 실상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일제에 의해 동원되어 생애와 죽음까지도 미화·조작된 채 또 다른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 된 전쟁영웅들의 비극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참고자료

표영수,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원병제도 연구, 숭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박민선, 전시체제기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제도에 대한 선전과 조선인 전쟁영웅화 작업 : 李仁錫의 사례를 중심으로, 숭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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