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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6월] 포모의 소장자료 소개 - 약탈적 식량 공출, 미곡공출제 -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2024-05-31 169

먼저 국가에서 필요한 것은 최대한 공출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쓰도록 각오합시다


약탈적 식량 공출, 미곡공출제 -


쌀포대[구입202]

일제강점기 조선의 곡물을 공출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백미 30kg 짜리 쌀포대



전시(戰時) 경제 정책의 핵심, 식량 정책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일제는 쌀 가격 안정을 위해 식민지 쌀의 내지(內地, 일본 본토)로의 이입을 통제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방차원에서 미곡의 안정적 공급을 중요시하였다. 연이은 풍작에 낙관적이었던 미곡 공급은 1939년 조선의 대흉작(대한해)을 계기로 급격히 악화되면서 일제의 전시체제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특히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 국내의 식량자급체제 확립이 더욱 절박해졌다. 일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량의 국가관리제를 단계적으로 추진해나갔다.

1939년 극심한 가뭄(대한해)의 대흉작 영향으로 조선미곡배급조정령에 따라 1940미곡년도부터 1943미곡년도까지 생산자에게 강제 공출을 명령하였다. 연도별 미곡년도 식량대책은 차이가 있다. 1940 대책은 기본적으로 과잉 지역의 과잉미가 통제의 대상이었지만, 전량이 아닌 일부였고, 이는 가뭄(旱害) 대책의 일환으로 임시적인 성격의 조치였으므로, 통제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미곡년도: 햅쌀이 나오는 1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쌀을 생산 및 출하하여 소비하고, 다시 생산출하할 때까지의 1년간.

하지만 1941 대책부터는 조선식량정책이 고도로 통제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본격적인 미곡 공출을 시작하였다. 통제의 대상은 과잉 지역의 과잉미 전부로 하고, 통제미 이외의 나머지 미곡은 통제미 할당량의 공출이 완료되기까지는 자유시장에 출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9438조선식량관리령을 공포하면서 국가가 직접 모든 통제미의 매상과 매도를 담당하는데, 같은 해 10월에는 국가 대행기관인 조선식량영단을 설립해 식량의 통제, 관리, 배급 체제를 한층 강화했다. 식량관리령의 통제 대상은 쌀, 보리를 포함한 주요 식량 전부(잡곡, 전분, 곡분, 감가 및 가공된 면류와 빵 등 포함)였다.

19442월에는 농업생산책임제를 채택해 조선 농민들에게 쌀과 보리 등의 식량자원 뿐만 아니라 축산물까지 책임 생산을 강요하게 된다. 같은 해 6월에는 미곡강제공출제(할당제)를 실시하여 남은 미곡을 강탈하기에 이른다. 전 농민(지주 포함)자신의 소유미 중 일정량 즉, ‘자가소비량을 제외한 전량을 공출해야 할 법적 의무를 지게 되었고, 할당량을 기관에 매도하지 않을 때는 체형 또는 벌금형의 처벌로 공출을 강제했다.


 

벼공출할당지정표[구입756]

납세고지서納稅告知書와 영수증領收證書. 납세고지서는 1943[昭和18]525일 구성면장龜城面長 岩永憲俊 명으로 작성 후, 직인 날인되어있으며, 615일까지 면사무소에 납부하라는 내용이 기재되어있다. 뒷면에는 제55호 벼 50가마니를 1130일까지 공출하라는 내용과 영수증이 수기로 기재되어있다.


공출의 폐해와 농민의 고통

일제는 중일전쟁 전후로 추진한 황국신민화정책과 전시체제 구축을 바탕으로 결전 체제로 끌어올리게 된다. 징용징병을 통해 병력과 노동력 자원을 동원하고, 공출을 통해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였다. 일제의 과도한 노동력 동원과 공출 강행은 농촌사회의 파탄을 야기하였고,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 빈민이나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농산물을 전부 공출하고 배가 고파서 일이 되지 않아서’, ‘비료 자금 등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서’, ‘내지(일본)의 탄광 등도 배급량이 적지만, 걱정 없이 확실하게 배급 받기 위해서등과 같은 이유로 이주 노동자 모집에 응모하는 동기가 공출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출의 고통은 단순히 식량부족으로 인한 배고픔만이 아니었다. 수량에 미달한 호수는 모두 범법자로 호출되어, 수색, 폭력행사, 벌금과 징역에 대한 두려움을 굶어 죽는 근심보다 더 크게 느끼면서 공출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할당량의 압박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까지 있었다.

특히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때 압박과 가혹행위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떤 지역은 구타와 고문 등 모욕적인 처벌이 농촌 사회에 큰 트라우마를 안겨주기도 했다. 날카로운 돌을 모아두고 그 위에 강제로 꿇어앉히거나, 북해도 탄광으로 보내 버린다는 협박을 하거나, 수치스럽게 알몸으로 달리기를 시켰던 사례도 있었다.

집집마다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숨기기도 했으나, 순경, 세무서, 읍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들키는 날에는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들은 집 안팎을 샅샅이 뒤지고, 폭력과 폭언을 일삼았고, 농민들은 연대책임이라는 명목 하에 이웃끼리 서로를 감시, 규제해야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공출 강행에 대해 농민들은 공출 기피, 태업, 이농(離農), 정면 저항 등으로 대응하기도 하였지만, 일제는 이를 막기 위해 처벌로 체형(體刑)까지 구사하며 농민들을 탄압하였다. 이처럼 공출은 농정(農政)의 파탄과 이농(離農)을 일으켰고, 수탈을 위한 각종 가혹행위와 처벌 등으로 농촌사회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참고자료

조선총독 10인 친일문제연구 제5집 친일문제연구회 엮음 1996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 2019

김영 滿洲國에서의 일제의 米穀政策과 이주 조선인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7

김영희 일제말기 국민총력운동의 전개와 농촌통제정책

허영선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제주지역에 끼친 영향 구술을 통해 본 제주지역 공출 사례와 양상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