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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

2022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학술 세미나 자료집

2022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학술 세미나 자료집

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

2022년 1월 27일 목요일
14:00~16:00

DATE

주최

후원

사회_ 임재성(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주제발표

자료를 통해 본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정혜경(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강동진(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

지정토론

허광무(한일민족문제학회 회장)

조건(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PROGRAM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

Zoom 웨비나 

 PLACE

* 외부공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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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후원

2022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학술 세미나 자료집

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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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인사말씀・축사

인사말씀

05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김용덕이사장

축사

07

-행정안전부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윤병일단장

Session 01. 주제 발표

사회_ 임재성(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01.자료를통해본미쓰비시‘사도(佐渡)광산’조선인강제동원실태

08

-정혜경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대표연구위원

02.근대기의세계유산:갈등과극복의조건

58

-강동진경성대도시공학과교수,ICOMOS한국위원회이사

Session 02. 지정 토론

01.미쓰비시사도(佐渡)광산조선인강제동원실태에대해

78

-허광무한일민족문제학회회장

02.강동진,「근대기의세계유산:갈등과극복의조건」에관한토론

81

-조건동북아역사재단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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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김용덕입니다.

오늘재단에서개최하는「세계유산등재추진‘사도광산’의강제동원역사왜곡학술세

미나」에참석해주신여러분께감사의인사를드립니다.

지난2015년일본정부가군함도등조선인강제동원사실이있는근대산업시설을유

네스코세계유산으로등재한바있습니다.한국을포함한관련국정부의우려를반영하여

유네스코총회에서는강제연행의사실을밝히도록하였고,일본대표도이를받아들인바

가있습니다.그러나일본정부는이를묵살하고강제동원사실을부인하는발언을전시

하고있을뿐아니라,지난달28일,일본문화청은또한번강제동원역사를지닌사도

광산을세계유산으로등재하고자결정하였습니다.

재단은국내강제동원전문공공기관으로서사도광산강제동원피해사실에대한진

상규명과,강제동원피해자의존엄회복을무엇보다중요하게생각하고있습니다.이에

저희재단에서는일본정부의사도광산세계유산등재와그대응방안에대하여,관련

전문가및정부관계자,또언론종사자분들을모시고논의해보고자오늘이자리를마

련하게되었습니다.귀중한시간할애하여자리를빛내주신모든참석자분들께감사드

립니다.

또한정부의방역수칙에따라불가피하게영상으로밖에참석하지못하는분들께죄송

하단말씀을드릴수밖에없습니다.빨리코로나상황을벗어나,자유롭게얼굴을맞대고

논의하는때가오기를기대하고있습니다.

오늘나누게될뜻깊은이야기들이,향후사도광산을포함한강제동원관련일본산업

유산등재대응에대한더많은관심과대화로이어지길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1월27일

재단법인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

인사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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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안녕하십니까?

행정안전부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장윤병일입니다.

오늘‘일본사도광산조선인강제동원실태와진상규명및유네스코세계유산등재와

대응’논의를위한세미나를개최하는것은일본의역사왜곡의심각성과일본의사도광

산유네스코등재움직임이있는시기에시의적절하다는점에서매우의미있다고생각

합니다.

먼저,이번세미나를준비하시느라수고하신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김용덕이사

장님을비롯한관계자들의노고에감사드립니다.또한,오늘의발표를맡은정혜경위원

님과강동진 교수님, 토론을 

맡아주신 

허광무 

회장님과 

조건 위원님께도

감사드리며,

코로나19상황으로직접참석해주시지는못하셨지만온라인을통해이자리를함께해

주신유가족분과내빈여러분께도감사의말씀을드립니다.

우리가잘아시다시피일본은지난2015년군함도근대산업시설을유네스코세계문화

유산으로등재하면서‘조선인강제동원명시’약속을불이행하는등역사적과오는감추

고있는것이현실입니다.이번일본의사도광산유네스코등재신청은지난2015년등재

건을교훈삼아충분하고객관적인자료를확보하여면밀한대응이필요하다고생각됩니

다.더나아가지난2015년군함도와이번사도광산강제징용이유네스코가추구하는인

간의존엄의가치에부합하는지도논의되길기대합니다.

아무쪼록,이번세미나를통해사도광산에강제동원된우리선조들의실태와진상이조

금이나마규명되고,일본이사도광산의진실을숨긴채,유네스코등재를시도하는일이

다시는발생하지않길바랍니다.

다시한번오늘세미나를준비하신관계자들의노고에감사드리며,이자리에함께해주

신모든분들의건강과행운이가득하시길기원합니다.

2022.1.27.

행정안전부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장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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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Session 01. 주제 발표

2022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학술 세미나

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

Session 01. 주제 발표

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정혜경(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대표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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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정혜경(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목차

1. 머리말 

2. 사도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

3. 자료를 통해 본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1)동원주체(일본정부,기업)가생산한자료

2)명부에나타난사도광산조선인강제노동실태

3)피해자의기록을통해본사도광산조선인강제노동실태

4. 맺음말 – 완전한 역사를 공유하기 위한 길

1. 머리말 

2021년12월28일일본문화심의회는니가타(新潟)현사도(佐渡)시소재사도광산을2023년세계문화유산

추천후보로선정했다.만약일본정부가2022년2월1일까지세계문화유산등록을위한추천서를유네스코

에제출한다면사도광산은일본의세계문화유산후보가된다.

이과정에서나타난등재시도의가장큰문제점은일본이사도광산의대상시기를센고쿠(戰國)시대

(1467~1590년)말부터에도(江戶)시대(1603~1867년)로한정했다는점이다.일본이신청하려는시기는

1467년부터1989년까지사도광산의전체역사가운데일부에불과하다.이러한등재시도는두가지문제점

을가지고있다.

첫번째는유네스코의입장과거리가있다는점이다.현재유네스코는일관되게세계문화유산등재신청대

상지에대해신청기간을전후한모든역사를기술하도록권고하고있다.대표적사례는2015년일본이등재

한‘일본규슈(九州)・야마구치(山口)일원의공장・탄광유적(일명근대산업유산)’이다.당시일본은2차세계대

전기간을제외하고메이지시기로제한해등재했지만유네스코는신청기간전후역사를모두서술하라고권

고했다.이입장은2021년44차세계유산위원회에서결정문채택을통해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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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두번째는사도광산이신청하려는현장(Site)의대부분은에도시기이후에조성된시설이라는점이다.일

본측이에도시대에조성했다고주장하는시설도에도시대이후쇼와(昭和)까지사용했던곳이다.1)『사도광산

사』초고원고에서도“부유선광장을신설하는등획기적인개혁을실현해여러곤란을극복하고1940년에생

산신기록을달성”했다고기술했다.2)‘획기적인개혁’이라언급한부유선광장은1938년에설치한시설이다.

㈜골든사도가개설한사도광산홍보홈페이지(https://www.sado-goldmine.jp/towards/)에따르면,사도

광산의상징물이라고하는‘V자형산봉우리’도1885년에다이너마이트를사용한결과물이다.니가타현홈페

이지(https://www.city.sado.niigata.jp/site/mine/4487.html)에서내세우는사도광산의독특한제련법(灰

吹法.하이후키호3))도조선에서전수받은기술일뿐이었다.이에대해서는이미1990년대에일본광산학계에

서‘중국에서조선에이전한기술을일본이전수했음’을입증했다.구체적으로1503년에조선의단천은산에

서사용한기술을이와미(石見)은산이이전했다고제시했다.4)이같이사도광산이자랑하는에도의제련기술은

당시동아시아의교류에따른산물이자사례중하나다.

장소성이란역사성의축적물이다.하나의유적에는수백년이넘는역사의더께가쌓여간다.1467년

~1989년(폐광)까지사도광산의현장이쌓아온역사의더께에서1467~1867년만을발췌한다는것은불가

능한일이다.

2021년말일본의사도광산세계유산등재신청은바로상식을회복하는세계시민의노력이시작되었음

을의미한다.세계시민이공유해야하는완전한역사(FullHistory)를알기위해사도광산이담고있는역사

로들어가보자.

에도시대사도광산은무숙인(homeless)과죄수들의노역지이기도했다.2021년7월21일에방영한일본

NHK프로그램(역사탐정-천하인의야망,사도금산)에따르면,에도시대절해고도(絶海孤島)사도섬광부

들의수명은2~3년에불과했다.참혹함을알수있다.참혹한역사는그뿐아니다.조선인강제동원의역사

도있다.

이발표에서는자료를통해미쓰비시사도광산의조선인강제동원의실태를살펴보고자한다.사도광산의

조선인강제동원관련자료는크게동원주체의자료와피해자의기록으로구분할수있다.동원주체의자료

로는사도광산이감독기관에제출한보고서2건과공탁금현황자료이다.피해자의기록은2015년에해산

한위원회(국무총리소속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의조사결과

와임태호의구술기록이다.그외2건의조선인노무자명부가있다.이같이사도광산조선인강제동원관련

자료는일부찾을수있다.그러나사료의조각을모으고맞추는일은산적해있다.

1)   상세한 내용은 정혜경・허광무, 『탐욕의 땅, 미쓰비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 도서출판 선인, 2021, 57쪽

2)   平井榮一, 『佐渡鑛山史 稿本』, 1950, 419쪽, 844쪽(일제피해자지원재단 제공 자료)

3)    작게 분쇄한 광석에서 금은분(불순물 포함)을 회수해 납과 같이 숯불로 녹여서 금은과 구리의 합금을 만든 후, 합금을 솥에 넣고 가열해서 금과 은을 

추출하는 방식

4)    萩愼一郞, 『鑛山』, 『新體系 日本史2 – 産業技術史』, 山川出版社, 2001, 90~92쪽. 일본에서는 재취법을 이와미은산이 1533년에 하카타의 상인이 

독자적으로 만든 기술을 받아들인 독창적인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자료 제공 박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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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그간피해의역사에서실증주의는부정론자들이‘있었던사실’을부정하는반박도구,즉‘부정의실증주

의’로사용되기도했다.특히문서가아닌기억에토대한상대방의증언이지닌허점을파고들어기억의진

정성에타격을입히기위해사용했다.대표적인사례는일본군위안부피해나나치의유대인집단학살,난징

(南京)대학살문제등이다.5)그러한점에서실증주의는‘있었던사실’에다가서는유일한방법이아니며,일

일이‘부정의실증주의’에맞서는것은소모적일수있다.

그러나일본은2015년‘근대산업유산’등재후도쿄의정보센터를중심으로실증주의를앞세운역사왜

곡을본격화하고있다.이러한흐름은사도광산의등재과정을통해가속화될수있다.소모적이라고외면

할수있는상황은아닌것으로보인다.그렇다면‘있었던사실’에대한진지함과학문적성실함으로‘부정의

실증주의’와맞서야한다.또한일반시민들이‘사실의무게’를느끼며,스스로‘부정의실증주의’를넘어설

수있도록돕는것도학계의역할이다.이발표를통해사도광산조선인강제동원관련자료(문헌,구술)를

분석소개하는이유이다.

2. 사도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

사도광산은일본헤이안(平安)시대말부터사금의산지로알려졌고1542년에은을캐기시작해1601년

부터금산을운영한후1989년까지주로금을캔곳이다.센고쿠시대에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사

도광산의은을임진왜란당시군자금으로사용했고,에도막부시대의권력자들은통치자금으로사용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는침략전쟁을위한군수물자원료조달처였다.이같이사도광산은침략전쟁을위한

탐욕의땅이었다.그곳에조선인이있었다.일본의침략전쟁에강제동원된조선인이었다.

에도막부의권력자인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는1601년에사도섬을천령(天領)이라는직할령으

로지정하고1603년일부를직영으로운영했다.그러다가메이지(明治)정부가들어서자정부의관유화조

치에따라1868년공부성(工部省)이소유하게되었다.그후농상무성(農商務省)과대장성(大藏省)을거쳐

1889년궁내성(宮內省)어료국(御料局)소유로바뀌었다가1896년에미쓰비시합자회사의손에넘어갔다.

미쓰비시합자회사는1918년미쓰비시광업(주)이되었다.

미쓰비시는1871년5월부터탄광업을시작했다.미쓰비시그룹의일원인미쓰비시광업(주)은일본이아

시아태평양전쟁에서패전할당시일본에서18개소의탄광과28개소의광산을운영했다.6)한반도와중국만

주,동남아시아,사할린등에서운영한탄광과광산을합하면규모는훨씬많다.모두조선인을동원한현장

이다.

5)   임지현, 『기억전쟁』, 휴머니스트, 2019, 36~37쪽

6)   三菱鑛業セメント株式會社總務部社史編纂室 編, 『三菱鑛業社史』, 1976,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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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일본패전이후에도금채굴은계속했으나바다아래갱내채광장이수몰되면서1952년부터일부시설을

폐쇄하기시작했다.그리고1989년3월모든채굴을중단하고미쓰비시머터리얼(미쓰비시광업(주)의후

신)의자회사인㈜골든사도가운영권을인수했다.1896~1989년간미쓰비시가채굴했던세월은103년이

고,지금도미쓰비시그룹소속이다.7)

일본이침략전쟁을일으키기전에도사도광산에는조선인이있었다.최초의조선인은1889년궁내성어

료국이설치한사도광산학교(기술자양성소)입학생이다.1892년4월제1회졸업생명단에서조선인박창

규(朴昌圭),구연수(具然壽),박치운(朴致雲)의이름을볼수있었다.이들은조선정부의광산정책에따라입

학해근대광산학을배웠다.8)

이후에도돈벌이조선인이있었다.미쓰비시광업(주)이작성한자료(1902~1929년)에서확인한조선인

노동자21명이다.21명에불과했던사도의조선인광부는일본이아시아태평양전쟁을일으킨후큰규모로

늘어났다.

사도광산의조선인강제동원은당국이정책을수립하기이전부터시작되었다.한반도에서일본지역으로

노무자송출은1939년7월4일각의결정‘쇼와14년도노무동원실시계획강령’과1939년7월28일일본

내무성·후생성차관이내린정책통첩(「조선인노무자내지이주에관한건」)에따라9월부터실시했다.그

러나사도광산은이보다앞선1939년2월부터조선인동원을시작했다.사도광산측은1939년2월할당모

집방법으로충남지역출신자들을제1진으로동원했다.제1진으로입산한조선인의정확한규모는알수없

다.당시노무과원은“내지인(*일본인)갱내노무자에게규폐(진폐)환자가많아출광성적이기대에미치지

못하고내지의젊은이들이군대로가야하므로”조선인을동원했다.9)

7)   ㈜TEM硏究所, 『佐島金山』, ㈜GOLDEN佐島, 2001, 2~3쪽

8)   相川町史編纂委員會, 『佐渡相川の歷史 - 通史編, 近現代』, 1995, 233~241쪽

9)   相川町史編纂委員會, 『佐渡相川の歷史 - 通史編, 近現代』, 1995, 680쪽

<그림 2> 건물 기와에 새긴 미쓰비시 문양

<그림 1> 미쓰비시 마크가 선명한 벽(2019.5.13.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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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사도광산이남긴자료에따르면,1940년2월부터1945년7월까지조선인을동원했다.충남지역에서시

작해경북,전남,전북,충북,함남등으로동원지역도넓어졌다.현재파악한동원규모현황을보면다음과

같다.

<표 1>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규모 현황(단위 : 명)

연번

조사 시기

동원 인원*

현재 동원 인원**

근거

1

1940년

850(모집허가)/

651(동원)

-

(재)중앙협화회 자료  

2

1940년 7월

-

332

사도광업소 자료

3

1942년 6월

1,003

802

(재)중앙협화회 자료

4

1943년 5월

1,005

584

사도광업소 자료

5

1943년 5월

-

584

히라이  에이이치(平井榮一), 

『佐渡鑛山史 

稿本

』, 1950, 846쪽 

6

1944~1945년

514

(1,005+514=1,519)

(584+514=1,168)

平井榮一, 

『佐渡鑛山史 稿本』, 846쪽 ※증

가분

10)

7

패전 당시

1,200

-

相川町史編纂委員會, 

『佐渡相川の歷史 

-  通史編, 近現代

』, 1995, 680쪽 ※추정

8

패전 당시

2,379

-

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者+新史料』, 

6~7쪽

9

1949년 2월

1,140

-

공탁금 자료 현황표

* 조사 시기 기준 총 누적 인원(연인원)

** 동원 후 탈출이나 전근, 감원 등 이유로 남은 인원(실제 노역에 투입한 가동 인원) 

총누적인원과실제동원인원을모두기재한자료도있으나일부인원만기재한자료도있다.사도광산

조선인동원규모는확정하기어려우며,향후자료발굴성과에따라변할것으로보인다.

<표1>에서3번과4번을보면,총누적인원의변동이2명에불과하다.이는1942년하반기에조선인동

원실적이없다는의미가된다.6번은1944년이후증가분514명을의미한다.총누적인원과현재동원인

원여부는알수없다.다만이를4번의총누적인원에합산하면1,519명이되고,현재동원인원584명에

합산하면1,168명이된다.11)

8번은연구자(익명)의추정치로서보완이필요한수치라생각한다.연구자는6번의‘1,005+514=1,519’

10)   히라이는 ‘514명의 증가로 조선인은 압도적인 노동자였다’고 표현했다. 히라이, 앞의 책, 846쪽

11)   1,168명은 1949년 공탁 당시 인원 1,140명에 근사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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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Session 01. 주제 발표

의연평균치(1942.3~1944.3)434명을산출하고이를1942~1943년등2년치868명으로상정해합산하

는방식으로2,379명을추산했다.12)그러나1942년하반기의동원여부를확인할수없으므로무리한추산

이라고생각한다.9번은일부채권자의인원수이다.

조선인들은시모야마노가미마치(下山之神町)의야마노가미(山之神)사택,신고로마치(新五郞町)의제1상

애료,스와쵸(諏訪町)의제3상애료,지스케마치(治助町)13)의제4상애료등총4개소의합숙소(일명함바.飯

場)・사택에서생활했다.14)<그림3>의식당은제1상애료에딸린식당이다.15)

조선인들은매일합숙소식당에서밥을먹고갱구까지거친길을1시간반동안걸어서다녔다.평탄하지

않고거친산길을오르내린대가는부상과진폐후유증이었다.

미쓰비시광업과도쿄광산감독국,그리고특별고등경찰과협화회는사도광산의조선인을철저히감시하

고단속했다.그러나조선인은굴종하지않았다.1943년6월,사도광산측이작성한보고서에따르면,1942

년3월기준으로동원한1,005명의조선인가운데148명이탈출했다.16)

사도광산은니가타항에서멀리떨어진섬이어서지역민의도움이없이는탈출이불가능했다.그런데도조

선인은탈출을멈추지않았다.1940년2월~1942년3월까지탈출자148명은사도광산이동원한조선인의

14.7%에달했다.

일본의국가총동원체제기(1938~1945)에끌려온조선인은다양한형태로저항했다.수백명단위로적

12)   『

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者+新史料』, 强制動員ZOOM講座 발표문, 2021.10.23, 6~7쪽

13)    사도시에는 지스케마치(治助町)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고, 아이카와에 지스케마치(次助町)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선행연구의 착오로 보인다. 허광

무 제공

14)   

平和教育研究委員会 編, 『新潟縣における韓国・朝鮮人の足跡をたどる』, 2010, 6쪽

15)   아사히 신문기사(그림 15)에 따르면 이 외에 금강료가 있었다고 하는데, 1943년 사도광산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금강료는 일부 조선인을 특별

교육시키는 장소였으므로 상시적으로 운영한 숙소로 보기 어렵다.

16)   본 발표문 3장 1절 참조

<그림 3> 조선인 합숙소(제1 상애료) 식당 자리(2019.5.13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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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극봉기하기도했고,파업과태업을일으키기도했다.일본의노동현장에서파업과태업으로맞선이들은

10만명이넘었다.사도광산에서도파업사례가있었다.당국은‘불온한행동’이라표현했다.

일본내무성경보국의『특고월보(特高月報)』에따르면,1940년2월17일,신보료(新保寮)17)소속최재만

(崔在万)을대표로한40명의조선인이‘불온한행동’을보였으나당일해결(?)했다.두번째투쟁사례는

1940년4월11일97명이일으킨파업이었다.이사건은4월13일에끝났는데,경찰이개입해서주모자3

명은조선으로송환했다.‘1942.4.29.미쓰비시사도광업소소속조선인노무자3명이경관에연행되자동

료160명이사무소로난입해항의하다가8명이체포’되었다는자료도있다.18)3건가운데2건은경찰이개

입했다.

3. 자료에 나타난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1) 동원주체(일본 정부, 기업)가 생산한 자료

사도광산에조선인을동원했던주체는일본정부와기업(미쓰비시사도광업소)이다.이가운데먼저일본

정부가남긴자료를살펴보면,공탁금관련기록이있다.

17)   조선인 숙소(료)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18)    內務省 警保局, 『特高月報』1940년 3월분, 4월분; 張明秀, 「

新潟県在日朝鮮人関係年表」, 『新潟近代史研究』3, 1982, 122~123쪽; 姜徹, 

『在日朝鮮人史年表』, 雄山閣, 1983, 194쪽

<그림 5> 구치소 자리(조선인 사택 자리로 추정)

<그림 4> 천정에서 벽에서 떨어지는 광석들, 위험한 현장(2019.5.13.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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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Session 01. 주제 발표

  공탁금 관련 기록

조선인공탁금관련자료는일본패전후일본정부가일본에동원했던조선인귀국과정에서미수금지급

을통제하는과정에서발생한자료이다.당시일본기업은귀국하는조선인들에게임금,강제저금,가족송

금,후생연금,보험금,퇴직수당,조위금,각종보험금을지급하지않았다.그리고일본정부와당시일본을

통치하던연합국군사령부(GHQ)는1946년3월도쿄의일본은행에관리계정을만들고기업들에게미수금

을입금하도록했다.또한8월에는사법성이조선인노무자등에대한미불금등의공탁에관한건을제시

해공탁하도록규정했다.이조치에따라1946년부터1994년까지공탁을실시했다.19)

일본국립공문서관쓰쿠바(筑波)분관에는「조선인의재일자산조사보고철-귀국조선인에대한미불임금

채무등에관한조사결과」와「경제협력한국・105・조선인에대한임금미불채무조」라는제목의자료가있다.

두자료모두인원수(1,140명)와공탁금액(231,059.59엔)에불과해인적정보는확인할수없다.20)

「조선인의재일자산조사보고철-귀국조선인에대한미불임금채무등에관한조사결과」는「조선인의재

일자산조사보고서철」에편철된20건의자료가운데하나이다.

「조선인의재일자산조사보고서철」은자료의성격을기준으로크게두종류로구분할수있다.전반부의

총405쪽(표지포함407쪽)은문서명이전보안(電報案)으로되어있는데홋카이도를비롯한36개도도부현

별로조사해노동성기준국급여과장앞으로보낸「귀국조선인에대한미불임금채무등에관한조사결과」

이고,나머지279쪽분량은1945년패전후조선인의미불임금채무등에대한조사와공탁에관해연합국

군최고사령부(GHQ/SCAP)와법무성・대장성・노동성・대일본산업보국회(大日本産業報國會)및각도도부현

간에주고받은공문서이다.이가운데사도광산의미불금기록은전보안에수록된「귀국조선인에대한미

19)   상세한 내용은 최영호 외, 『강제동원을 말한다 – 일제강점기 조선인 피징용 노무자 미수금 문제』, 도서출판 선인, 2015 참조

20)    이 자료에 대해서는 정혜경, 「일제말기 조선인노무자 공탁금 자료, 세 가지」(『강제동원을 말한다 - 일제강점기 조선인 피징용 노무자 미수금 문제』, 

도서출판 선인, 2015) 참조

<그림 7> 경제협력 한국・105・조선인에 대한 임금미불채무조 표지

<그림 6> 조선인의 재일자산조사보고철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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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불임금채무등에관한조사결과에편철되어있다.수록정보는다음과같다.

문서철 기업명

작업장

현 군

정/

번지

공탁/

채종류

공탁/

채무액

공탁/

채무자

공탁/

공탁
국명

공탁

연월일

공탁(계)/

금액

공탁

(계)/

인원

자산철

095

太平鑛

業㈜

佐渡鑛

業所







大字

北澤町

2번지

미불
임금

231,059.59  1,140  

新潟

사법사무국 
相川출장소

1949.2.25

231,059.59 

1,140 

「경제협력한국・105・조선인에대한임금미불채무조」는대장성국제금융국이작성한문서철이다.일본

국립공문서관쓰쿠바분관소장자료이다.사도광산과관련한공탁기록은한줄에불과하다.1,140명의미

불임금을공탁했음을알수있다.

기업명

채권자수

사업장

도부현

공탁처

채권자수

채무종류

수록면

大平鉱業 

21)

1522

 

岩手

盛岡供託局花巻出
張所

212

保管中の有価証券/
賃金他未払金

79

尾去沢

秋田

秋田司法事務局大
館出張所

170

公傷死亡者弔慰金/
公傷死亡者香典/退
職慰労金/賃金補給
金/厚生年金脱退手
当金/貯金

85

佐渡鉱

業所

新潟

新潟司法事務局相
川出張所

1,140

未払賃金

131

21)    미쓰비시광업은 1950년에 미쓰비시광업과 다이헤이(大平)광업으로 분리되었다가 다이헤이광업은 1952년에 미쓰비시금속광업으로 회사명을 변

경한 후 1973년에 다시 미쓰비시금속으로 변경했다. 미쓰비시광업은 1973년에 미쓰비시광업시멘트로 사명을 변경했다. 두 회사는 1990년에 미
쓰비시머터리얼로 통합되었다.

<그림 8>사도광산 해당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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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Session 01. 주제 발표

두건의공탁기록은두가지를의미한다.하나는최소1,140명의조선인을동원했다는점이다.또다른하

나는이들의급여와저축,각종보험금을본인에게지불하지않고공탁했다는점이다.더구나이공탁기록

은개인별정보가없어서개별성도확인할수없다.22)

  기업 생산 자료

미쓰비시광업사도광업소가생산한자료는현재2건존재하고있다.1건은1940년사도광업소가관변단

체인(사)일본광산협회에제출한보고서(반도인노무자에관한조사보고)이다.사도광산을비롯한여러광

산이제출한보고서이다.재일사학자박경식이편찬한조선문제자료총서2권(1981년)에수록되어있다.

목차는모든광산이동일하며,사도광산의해당내용은총7쪽이다.

목차

(1)지도훈육시설에관한사항

(2)대우에관한사항

(3)임금및저금상황

(4)분쟁,쟁의를일으킬경우기타원인및조치

(5)불량노무자에대한취급

(6)반도인이어떠한작업에적합한지에대한감상

22)    일본의 활동가 고바야시 히사토모(小林久公)가 2021년 11월에 이 자료를 근거로 니가타지방법무국에 정보공개를 신청했으나 이 내용 외의 자료는 

입수하지 못했다.

<그림 9>사도광산 해당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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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총6개항의목차가운데첫번째항의세부내용은가동상황(7월분)이다.이에따르면,1940년7월현재

동원한조선인은332명인데월평균28일간일을했다.

분쟁의원인을‘일부노무자의오해로인한우발적사고’로평가하고구체적으로‘언어불통으로인한오

해’‘이해도부족’‘동원과정에서노무과원의불찰로노무조건에대한오해’‘불량분자의선동에편승한반

도인특유의교활성부화뇌동성’으로기재했다.

1943년보고서는1943년6월7일,미쓰비시광업(주)사도광산측이감독기관인도쿄광산감독국과대일

본산업보국회,도쿄지방광산부회에제출한보고서(문서번호855호)이다.조선인노무관리연구협의회개최

요강과보고서등두종류의자료인데,보고서의제목은「사도광업소반도노무관리에대하여(佐渡鑛業所半

島勞務管理ニ就テ)」이다.

자료는23쪽인데,이가운데사도광업소반도노무관리에대하여는19쪽이다.1940년에비해보고서분

량과내용이늘었음을알수있다.이자료는나가사와시게루(長澤秀)가편찬한전시하조선인중국인연합

군포로강제연행자료집-석탄통제회극비문서2권(1992년)에수록되어있다.나가사와시게루는사도광

업소반도노무관리에대하여를인쇄체로전환해『在日朝鮮人史硏究』12호(1983년)에수록했다.

<그림 10>1940년 보고서 첫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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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Session 01. 주제 발표

제2장을통해직종별현황을알수있다.“반도노무자중대부분을정하는갱내부”라는점을명시했고,도

표를통해직종별인원현황을제시했다.<표2>에따르면,일본인은잡부나기타도많지만내운전부나공

작부,제광부가다수이다.주로제련을하거나기계를작동했다.23)이에반해조선인은착암부와운반부,외

운반부등갱내작업에투입되었다.위험하고도진폐증을유발할수있는작업현장이었다.『佐渡鑛山史稿

本』를집필한히라이도일본패전후사도광산의상황을언급하면서“조선노동자는거의전부가갱내관계작

업에종사”했는데,“모두귀국해버려갱내작업은큰타격을입었다”고기술했다.24)

<표 2> 민족별 직종 현황(1943년 6월 기준)(단위 : 명/%) 25)

구분

일본인

조선인

합계(명)

일본인 1인에 대한 비율

착암부(鑿巖夫)

27(18.0)

123(82.0)

150

4.5

지주부(支柱夫)

39(41.1)

56(58.9)

95

1.4

운반부

80(21.4)

294(78.6)

374

3.6

내 운전부

19(70.4)

8(29.6)

27

0.4

외 운반부

17(25.8)

49(74.2)

66

2.8

공작부

23(88.5)

3(11.5)

26

0.13

정지부(整地夫)

46(68.7)

21(31.3)

67

0.46

제광부(製鑛夫)

85(81.7)

19(18.3)

104

0.22

잡부

52(82.5)

11(17.5)

63

0.21

기타

321(100)

0

321

합계

709(54.8)

584(45.2)

1,293

0.82

23)    

広瀬貞三, 「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者(1939~1945)」, 『新潟国際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人文科学編]3, 2000, 10쪽. 히로세는 일본인

이 100%에 달하는 기타 직종을 선광장으로 추정했다.

24)    平井榮一, 『佐渡鑛山史 稿本』, 1950, 848쪽(익명의 연구자 제보를 받아 일제피해자지원재단이 입수한 신규 자료)

25)   굵은 글자 : 인용자 표시

목차

1.관리방침

(1)일반적취급방안

(2)대우

(3)도망방지

2.관리현황

(1)이입수및이입후감원실상

(2)수용상황및가동상황

(3)직종별인원

(4)저금및송금상황

(5)훈육

3.임금지불및계산방법

(1)임금규정

(2)지불

(3)가동장려방법

4.복리후생시설의개요

(1)생활보조

(2)위생

(3)협화회

(4)기타

5.급여규정(식량등)에관한문제

6.계약기간갱신의유효방책

자료 : 佐渡鑛業所, 「半島勞務管理ニ就テ」(1943년 6월); 平井榮一, 「佐渡鑛山史 稿本」, 1950, 8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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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사도광산은1943년5월현재총1,005명의조선인가운데584명을노역에투입했다.1,005명의동원자

가운데주목할점은전출자와감원자,그리고148명에달했던탈출자,1%에달했던사망자이다.

1943년의사망율1%를같은시기일본지역탄광산노무자의사망률과비교해보면높은편이다.일본전

지역조선인노무자사망률은0.9%(1939.10~1942.10기준)이고,후쿠오카관내조선인노무자사망률은

0.6%(1944년1월기준)이다.

전출과감원은일본당국의금광산조정령에따른조치로보인다.당국의금광업정비방침은'특정중요광물

의급속증산에대처하고동・구리・아연・수은・철・망간등중요광물의생산을확보하기위해<중략>금광업의

정리를단행'한정책이었다.조선인노무자의배치전환에대해서는취급요령에서‘기간만료가가까운자는

가능한한기간을연장하여전환취직을지도’하고‘협화회를통해협력하도록’했다.1942년11월30일상

공성이발표한「금광산조정령」에의한금광산의보・휴・폐광과‘설비및노동력의배치전환등’에관한내시

(內示)및1943년1월각의결정‘금광업정비에관한건’,4월1일자「금광산정비령」실시에따라이루어졌

다.이조치에따라사도광산도금은광을휴광하고구리채굴에집중하게되었으며이과정에서전출과감

원을실시했다.26)

26)    감원보다는 전출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원회 피해조사 명부 148명 가운데 확인이 가능한  142명의 동원시기를 살펴보면, 1943년에 귀환한 

조선인은 3명에 불과했다. 이를 통해 사도광산의 인원 감축 후에도 많은 광부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작업장으로 전근되었다고 판단
된다.

<그림 11> 1943년 조선인 동원 현황( 「半島勞務管理ニ就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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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Session 01. 주제 발표

<표 3> 사도광산이 동원한 조선인 광부(1943년 5월 기준)(단위 : 명/%)

내용/연월

1940년 2월

1940년 5월 1940년 12월

1941년 6월 1941년 10월

1942년 3월

합계(%)

출신군

논산

논산,부여,

공주

논산,부여

논산,부여,

연기

청양,논산

청양

-

동원수

98

248

300

153

127

79

1,005명

고용기간(연)

3

3

3

2

2

2

-

사망

1

3

0

3

2

1

10(1.0)

도주

14

46

51

19

12

6

148(14.7)

공상 송환

2

0

1

2

1

0

6(0.6)

사증(私症) 
송환

8

10

6

4

0

2

30(3.0)

불량 송환

6

12

3

3

1

0

25(2.5)

일시 귀국

2

29

31

5

5

0

72(7.2)

전출

1

31

74

24

0

0

130(12.9)

감원총수

34

131

166

60

21

9

421(41.9)

현재수

64

117

134

93

106

70

584(58.1)

<표 3> 한글로 작성한 조선인 동원 현황(*굵은 글자 : 인용자)

두보고서를통해조선인노무자에대한광산측의인식을잘알

수있다.1940년과1943년보고서에서공통적으로볼수있는용

어는‘훈육’이다.조선인노무자의탈출원인에대한인식도차이를

찾을수없다.1943년보고서의차이는‘자유방임과부화뇌동성’과

함께‘계획적도망자’를추가한것이다.특히조선인이‘도일이전부

터탈출을계획’한것으로파악하기도했다.이에대한대책으로‘철

저한단속강화’와함께‘도망중개자’에주목하고있다.도망중개

자란현지주민을의미하는것으로보인다.사도는섬이라는지형

으로인해현지주민의도움없이는탈출이불가능했기때문이다.

또한1943년보고서는탈출원인외에도조선인을폄하하는내

용으로일관했다.‘위생’항목에서“반도인특유의불결한악습”을

시정하기위한조치를취하고있다는내용등이다.특히악습자는

금강료에별도수용해서특별교육을실시할계획도수립했다.

<그림 12> 1943년 보고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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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2) 명부에 나타난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사도광산관련일본정부와기업이작성한명부는현존하지않는다.현재발굴한사도광산관련명부는조

선인연초배급명부,조선총독부지정연령자연명부등2종이다.27)

일본국가총동원시기(1938~1945)에미쓰비시광업(주)은46개소의탄광과광산에다수의조선인을강제

동원했다.그러나당시또는일본패전직후일본정부및GHQ의지령에따라기업이작성・제출했던명부

는일부에그쳤다.특히니가타(新瀉)현사도(佐渡)시소재미쓰비시광업(주)사도광산의경우에는현재일본

정부와기업이생산한명부는전혀없다.

이점에서현재사도시사도박물관이소장하고있는관련명부2종(조선인연초배급명부,조선총독부지

정연령자연명부)은매우중요하다.이명부는공개자료이지만그간소재에대해알려지지않았다.알려지

게된것은2019년일제피해자지원재단학술연구용역(일본지역탄광・광산조선인강제동원실태-미쓰비

시(三菱)광업(주)사도(佐渡)광산을중심으로-)보고서를통해서였다.연구를수행(정혜경)하는과정에서사

토타이지(佐藤泰治)를통해제공(허광무의도움)받았다.그러나연구에활용한적은없다.

‘조선총독부작성지정연령자연명부’는바로조선총독부가조선인을일본에동원하는과정에서작성한

명부라는점에서의미가높다.현재일본정부나우익,그리고국내역사부정론자들이동원에서일본국가

권력의개입을부정하는상황에서이명부는바로조선총독부가조선인강제동원을직접주관했음을명백

히보여주는자료이기때문이다.‘지정연령자연명부’라는형식의명부가그간발굴된적이없다는점에서

도이자료가갖는의미를생각할수있으며,다른작업장을대상으로한명부의추가발굴가능성을엿볼수

있다.‘조선인연초배급명부’또한담배가작업현장에서일본당국이노무자들에게지급한필수품목이었

으므로사도광업소외다른작업장에서도명부발굴가능성이있다.

(1)조선인연초배급명부

조선인연초배급명부는사도시사도박물관이1980년초에수집한총3개소의료(寮,노무자숙소)에거주

한조선인명단(조선인연초배급명부)이다.조선인숙소와가까운곳에있던전당포겸담배가게의구가(舊

家)가소각하기직전의자료가운데에서조선인노동자의명부가발견되어1943년및1945년에기숙사에

있었던417명의조선인이름과생년월일을알수있게되었다.28)*부록참조

27)    상세한 내용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일본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 미쓰비시광업(주) 사도광산을 중심으로(책임연구원 : 정

혜경)』, 2019 

28)   신문기사(그림 15)에서 혼마관장은 조선인 료를 상애료 외에 금강료(특별교육장소)를 추가해 4개소라고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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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조선인 연초배급명부의 발굴 시기는 1980년으로 추정한다.

1991년11월14일자아사히(朝日)신문기사에‘10년전쯤’발견했

다고언급했기때문이다.기사에따르면,1991년11월보도당시,

현지연구자들은한국현지조사를실시했다고하는데,확인할수

없다.

조선인연초배급명부는회사측에서광부들에게담배를지급하

는과정에서생산한명부이다.담배는강제동원현장에서당국이

노무자들에게지급한필수품목이었다.여성이나어린아이에게도

지급했다.

조선인연초배급명부의총수록인원은466명(일본인3명포함)

이다.조선인연초배급명부는두종류인데,제1상애료A형식은이

름과생년월일(서력,연호),이동관련정보,작성일자를기재한명

부이고제1상애료B형식(107명)은이름만기재한명부이다.45명

은A형식과중복된다.제3상애료명부에서도중복자가1명이있다.그러므로조선인463명가운데중복자

를제외한조선인은417명이다.

총수록인원가운데353명의작성일기준나이를확인할수있었다.나이는16~48세에걸쳐분포하고

있는데,평균나이는29세이다.

417명가운데7명은일시귀선증명을받아고향으로돌아간후복귀하지않고탈출했다.모두제3상애료

에수용되었던조선인들이다.

또한417명가운데5명은‘軍緊急工作隊’라는이름으로다른지역의작업장으로전근조치했다.명부에서확

<그림 13> 조선인 연초배급명부 표지 

<그림 14> 상애료 1-A의 첫 페이지

<그림 15> 상애료 1-B

<그림 16> 아사히신문 1991년 11월 14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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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인한전근광부는총5명(

金海大吾, 金山丁鳳, 金原振浩, 文玉男, 李周栄)이다.이들은1945년4월과6월20

일에전근되었다.지역사(『

佐渡相川の歷史 - 通史編, 近現代』)에서는1945년8월에이동했다고기술했다.지

역사기술의오류로보인다.

명부에서는전근지역을확인할수없다.그러나지역사기술에따르면,제1차정신대(전국광산특별정신

대)189명과제2차219명등총408명을각각사이타마와후쿠시마현으로파견해지하공장건설에동원했

다.29)사이타마로간제1차정신대원들은군의지하시설을조성했고,히타치(日立)항공기㈜히가시마쓰야마

(東松山)공장건설공사장과나카노지마(中島)비행기회사요시미(吉見)지하공장공사장에동원했다.후쿠시

마현으로간제2차정신대원은약3만3천평방미터의내탄지하공장건설공사(信夫山)에동원했다.나카노

지마비행기회사가월300대의엔진을생산하고자만든공장이었다.

당국이군사시설로전근을단행한이유는인원조정과함께일본전역에서구축중이던지하공장의인력

배분을위한조치였다.일본은1944년11월미군의대대적인공습을맞아1945년초부터비행기공장등필

수군수공장의지하화에착수했다.일본당국은1945년2월23일에‘공장긴급소개요강’을각의결정했다.

1944년까지내린각의결정의골자는군수공장주변의주택을철거해주택에붙은불이공장으로확산하지

않도록하는것이었으나1945년에는야산에지하공장을마련하거나식민지조선으로군수공장을이전하는

방안이었다.당국의정책으로항공기등주요병기공장을산속으로이전하는작업을시작했다.일본에조성

한지하공장은2천여개에이르는것으로알려져있다.

사이타마와후쿠시마로전근되었던조선인광부들은8월26일(후쿠시마조)과8월27~28일양일간모

두319명이사도로돌아왔다.본래파견자는408명이었는데,이사이에89명이행방불명이되었다.사이타

마와후쿠시마현지에서행방불명이되었는지,사도로돌아오는과정에서발생한행방불명인지는알수없

다.30)

(2)조선총독부작성지정연령자연명부

일본정부와기업이생산한명부는다양한종류이지만‘지정연령자연명부’는발굴된적이없는형식의명

부이다.

조선총독부작성지정연령자연명부는사도시사도박물관소장자료이다.그러나사도시사도박물관이조

선총독부작성지정연령자연명부를수집한시기와과정은알수없다.

총4장의사본에번호9751~9850까지총100명의이름과생년월일,본적지,거주장소,처리,통(通)번호

등총6개항목이기재되어있다.작성시기와작성부서는알수없다.표지가없는것으로볼때자료중일

부의사본인것으로보인다.‘조선총독부’‘지정연령자연명부’가명시된양식에수기(手記)로기재했다.

29)   相川町史編纂委員會, 『佐渡相川の歷史 - 通史編, 近現代』, 682~683쪽

30)   相川町史編纂委員會, 『佐渡相川の歷史 - 通史編, 近現代』, 6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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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사본의상태가불량해이름의일부만확인할수있으나본적지가함남과경북(영덕,봉화,청송,의성,영

일군),강원(울진군)이라는점과1901~1923년출생자임을알수있다.대부분경북과강원도출신자이다.

그러나주소지를기준으로보면강원(현재경북)과충북음성두지역의명부임을알수있다.히로세논문에

서는사도광산동원조선인의출신지역을충남과충북으로파악했으나이명부를통해다양한지역에서동

원했음을알수있다.함남갑산출신자가있으나울진군거주자인점을보면,함남에서집단적으로동원한

것으로보기는어렵다.이명부중일부식벼가능한이름을조선인연호배급명부와비교한결과52명의동

일인을확인할수있었다

작성시기를알수없으므로동원당시나이는특정할수없다.양식에기재된용어가‘지정연령자연명부’

라는점을볼때특정나이를대상으로한명부로보인다.조선총독부작성지정연령자연명부는바로조선

총독부가조선인을일본에동원하는과정에서작성한명부라는점에서의미가높다.사도광업소의사례를

통해기타다른작업장을대상으로한동일한성격의명부를작성했을것으로추정할수있다.향후적극적

인명부발굴의노력을기울인다면발굴의가능성이있다고생각한다.

3) 피해자의 기록을 통해 본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강제연행의문서가있다면내놓으라!’일본군위안부피해문제를둘러싼공박에서늘빠지지않는가해자

측의수사이다.그들은‘실증’이라는명분을내세워‘피해자는공적문서를남길수없다’는점을약점으로

삼고공격의빌미로활용한다.이러한전략은홀로코스트부정론자들이해오고있는방법이기도하다.‘나

치가홀로코스트를실행했다면히틀러의명령이남긴문서가있어야하는데,그런문서는한통도발견되지

않았다’는식이다.

피해자는공적문서를남길수는없으나기록을남길수있다.그가운데하나는한국정부가생산한기록

이고,또다른하나는경험자의구술이다.

<그림 17> 조선총독부 작성 지정연령자연명부의 사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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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1)위원회피해조사명부

위원회는2005년2월부터15개월간피해신고를받아2012년까지조사했다.이과정에서피해자로판정

한218,639건가운데,사도광산동원피해자로추정한규모는148명(여성1명포함)이다.이명부는2015

년위원회가일본의사도광산세계유산과관련해보도자료작성(작성자:정혜경)을위해추출해보도자료

에첨부했던명부이다.이름과접수번호.중복동원(전근)내용만담았다.동원지역은피해의결서의동원지

역과일치하지않는다.피해판정당시에자료를확보하지못해‘미상의작업장’이나‘니가타현소재불상의

광산’으로판정한내용을대상으로작업장주소를확인하거나동행자를확인하는방법으로발표자가추출

했기때문이다.

2019년에148명을대상으로일정시피징병징용자명부를통해동일인물(36명)을추출해국내현지조사

및전화조사를실시했다.또한일제피해자지원재단이행정안전부과거사업무지원단으로부터제공한자료

를통해일부피해사항을확인할수있었다.그러나생년월일등인적정보를일부만제공받았으므로상세

한분석은할수없었다.

■ 

출신 지역 :

148건가운데본적지를파악할수없는1건을제외한147명의출신지역현황은다음과같

다.

147명의출신지역은충남과충북,전남과전북,경북등5개도이며이가운데다수는충남이다.군단위

로살펴보면,공주(4명),논산(55명),대덕(1명),청양(12명),부여(7명),서천(1명),연기군(5명)등7개군이

다.

■ 

동원 기간 :

148명가운데145명의동원기간을확인할수있다.시기별로보면,1938년7명,1939년

12명,1940년21명,1941년32명,1942년25명,1943년22명,1944년22명,1945년4명이다.1939년

부터증가하기시작해1944년까지골고루분포되어있고1941년이가장많다.

확인이가능한142명의강제동원종료시기를보면,1941년부터1946년1월까지분포되어있다.여기서

주목할점은금광산조정령에의해사도광산의인원감축이이루어진시기에도귀환자는많지않았다는점

이다.현지사망자1명을포함해3명이1943년에귀환한것으로기록되어있다.이를통해사도광산의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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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감축후에도많은광부들은고향으로돌아오지못하고다른작업장으로전근되었다고판단된다.

■ 

관련 자료 현황 : 

위원회피해조사명부수록자148명가운데조선인연초배급명부에등재된동일인은

19명이다.그외일정시피징병징용자명부에서36명을,왜정시피징용자명부에서는5명을확인했다.

일정시 피징용징병자 명부 

 왜정시 피징용자 명부

ㆍ수록인원 : 228,724

ㆍ수록인원 : 285,771

ㆍ 작성배경 : 제2차 한일회담 준비를 위해 전국 단위로 조사

하고 도별로 취합해 제출한 명부로써 1953년 1월 내무부
가 최종 취합 합본

ㆍ 작성배경 : 제4차 한일회담에 대비하여 1957~1958년에 

걸쳐 노동청이 전국 단위로 신고를 받아 도별로 취합한 명

ㆍ 내용 : 성명, 생년월일, 주소(면리 단위), 동원기간, 동원지, 

귀환 및 사망 여부 등 수록. 군인, 군속, 노무자 등 포함

ㆍ 내용 : 성명, 동원 당시 연령, 주소(면리 단위),동원일, 귀환 

및 사망 여부, 귀환일 등 수록. 군인, 군속, 노무자 등 포함

ㆍ 특징 : 현존하는 最古의 강제동원 명부로써 정부 수립과 

6.25전쟁 등 혼란한 시기에 정부가 국가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한 사례
※  ’13.6. 주일 한국대사관 신축 이전과정에서 발견된 명부 

3종 중 하나 

ㆍ 특징 : 위원회가 전국 시군구 공무원 약 2천여 명과 합동으

로 ’06.6.~’08.12.(총 2년6개월)에 걸쳐 전수조사를 실시. 
211,342명에 대한 검증을 완료하여 118,520명을 피해자
로 확인 ‘검증-왜정시피징용자명부’로 활용

■ 

현지 사망과 후유증 상황 :

148명가운데12명이현지에서사망했고,무려73명이후유증을신고했다.

충남청양군출신의유성현은동원된후3개월만에갱내사고로사망했다.12명가운데9명은유골을봉환

했다.12명의사망자는148명가운데8.1%에이른다.

후유증가운데다수는진폐증이다.갱내에서암석을다이너마이트로폭발할때산산조각이난돌이먼지

가되어공기중에떠돌게된다.먼지는3~5미크론정도로아주미세해서눈으로보면연기처럼보일뿐이

다.연기처럼보이는가루는현미경으로보면창처럼끝이뾰족하다.이분진이폐를찌르면서쌓이면폐가

딱딱하게굳어지는데,이것을섬유화한다고한다.이상태에서는이산화탄소와산소의교환이어려워져서

호흡이곤란해진다.이것이진폐증이다.

1944년에사도광산진폐실태를조사한의사(齊藤謙)의『규폐병의연구적시험・보론』에의하면,분진의평

균수치는착암부가810cc,운반부가360cc,지주부가350cc,갱부가240cc이다.31)<표2>에서본바와같이

이러한직종에종사한이들은주로조선인이었다.이점에대해히로세는조선인을대상으로한조사기록이

라판단했다.32)

73명가운데30명이진폐증으로,15명이폐질환으로신고했다.이를통해45명이진폐증을앓았고,반수

가까운광부들이진폐증의고통을경험한것으로보인다.

■ 

기타 내용 :

148명가운데11명은다른지역으로전근된것으로보인다.전환배치된지역은후쿠시마(4

31)   

磯部欣三, 「佐渡金(銀)山の勞働力」, 地方史硏究協議會 編, 『佐渡 - 島社會の形成と文化』, 雄山閣, 1977, 62~64쪽

32)   

広瀬貞三, 「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者(1939~194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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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명)와사이타마현(2명)이가장많다.앞에서언급한전국광산특별정신대로전근한사례와관련이있을것으

로보인다.

또한광산으로전근사례로볼수있다.148명가운데,전근을신고한이들은총8명이다.이가운데2명

(백순기,김영기)은‘사이타마현소재닛치쓰(日窒)지치부광산’과‘효고현미쓰비시(三菱)광업㈜아케노베(明

延)광산’이라고광산이름을기억했다.두군데모두당시운영했던광산이었다.또다른1명은사할린의탄

광으로기억했다.이러한점을볼때현재연구나지역사기술에포함하지못한전근의사례는많고,전근지

역이나직종도다양했을것으로추정된다.

(2)사도광산에동원된조선인광부의경험세계

현재사도광산의생존자는찾을수없다.148명의위원회피해조사명부에서34명의생존자를확인할수

있으나행안부가확인할바에따르면생존자는없다.33)

임태호는1919년12월20일충남논산군에서태어나1940년11월사도에동원되었다.1997년9월사망

할때까지가나가와(神奈川)현가와사키시(川崎市)에살았던임태호는1997년5월사망하기직전길지않은

구술을남겼다.

임태호는1940년11월‘모집’이라는형태로젊은동료들과함께배를타고일본땅을밟았다.스무살의

청년이었다.좁은배에는조선인으로넘쳐났다.니가타현사도섬에도착하니산속오지의산정상에함바(飯

場.노동자숙소)가있었다.아이카와(相川)라는곳이었다.갈때는‘모집’이라고해서‘자유모집’이라고생각

했는데,도착해서‘징용’임을알았다.

미쓰비시사도광산생활이시작되었다.함바에서일하는곳까지는걸어서1시간반이나걸렸는데,평탄한

길이아니라오르내리는데고생스러운거친길이었다.더운여름날에도고생스러웠지만추운겨울에는말

로표현하기어려울정도로힘들었다.눈이무릎까지쌓여있었으므로일하는곳에도착하면다시돌아가는

과정이일하는것이상으로힘들었다.

임태호가하는일은갱내광석채굴이었다.갱내작업은죽음을맞닥트리는일이었으므로하루하루가공

포그자체였다.매일같이낙반사고가있었으므로‘오늘은살아서이지하를나갈수있을까’하는생각에

마음을졸이고살았다.사망자에게인간대접이라는것은없었고,아무런조의(弔儀)도없었다.

임태호는운이좋았는지다행히살아남았다.그러나그도지하에서작업중에발판이떨어지는사고로부

상을입고구사일생으로목숨을건졌다.의식을잃고정신이든곳은병원이아니라함바의이부자리였다.

허리를강하게맞아서일어나지도못하고병원에도가지못하고열흘정도누운채지냈다.간신히일어날

수있게되자다시일터로돌아가야했다.병에걸려도이틀이상은쉴수없는데,열흘이나일하지않았으므

로더이상쉰다는것은절대로용납되지않았다.작업중에두번째부상을입어다시손을사용할수없게

33)   위원회가 국가기록원에 이관한 구술기록(음성, 영상) 가운데 34명의 구술기록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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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되자이대로는살아서고향땅을밟는것도사랑하는가족과같이지내지못할것같다는생각이들어탈출

하기로결심했다.히로시마(廣島)로탈출후이곳저곳을다니다가가와사키에정착해조국의해방소식을듣

고너무나감격한나머지말보다눈물이먼저나왔다.

임태호에게조국의해방은일본제국주의로부터받은모욕적인경험으로부터해방이기도했다.그는“전

후반세기이상이지났으나오늘날에도여전히일본정부로부터진심어린말한마디를들은적이없다.죽

은동료들도지금은모두성불을하지않았을까생각한다.나와같은경우에있었던사람들이한사람이라

도살아있는동안에성의있는진정한사죄를받기를원한다”는말로구술을마쳤다.34)

사도광산은직할병원을운영하고있었다.그러나임태호는두번이나부상을입은와중에도병원치료를

받은적이없었다.여러차례부상은임태호에게탈출의계기가되었다.임태호가사도광산을탈출한시기

는밝히지않았다.탈출은현지어부나주민들의도움없이는어려운상황이었으므로현지민의도움이있었

을것으로보인다.

(3)피해자가소장한기록

위원회가인정한피해자148명가운데102명은협화회수첩이나사진,국민노무수첩등피해를입증할

수있는기록을소장하고있다.충남논산에거주하는유족가운데한사람(김종원피해자의아들)도직업능

력신고수첩과보험영수장을소장한주인공이다.

김종원의유족이소장한직업능력신고수첩은국민징용령(1939년7월8일제정.칙령451호)에근거해국

민징용대상자를선정하기위한법령(국민직업능력신고령)규정에의해발급한수첩이다.수첩소지자는국

민징용후보자라는의미가된다.

김종원은1940년10월3일직업능력신고수첩(職業能力申告手帳)을발부받았다.입산시기로보면김종원

은‘할당모집’의형태로동원된경우이다.수첩에‘채광부’로기재한점을통해김종원이갱내에서작업했음

을알수있다.사도광산은1944년12월18일군수성지정관리공장으로지정되어전원이협화회관에모여

현원징용영장을받았으나김종원은1943년에귀선했으므로피징용자가되지않았다.

또다른자료인보험료영수장(保險料領收帳)은보험증서이다.보험료영수장은1941년8월부터1943년3

월까지납입한증서이다.계약자는김종원이고매달7일에1엔20전씩납입했다.당시조선인노무자의일

반적인보험료납입방식은원천공제였다.자료에는‘

募集人拂込’이라는도장이찍혀있다.기재내용을액

면그대로이해하면이보험료는모집인이납입한셈이된다.사도광산이작성한자료에“단체생명보험료는

모두회사가부담”한다고기재한내용과차이가있다.35)또한모집인이보험료를납입했다는것은김종원의

34)   朝鮮人强制連行眞相調査團, 『朝鮮人强制連行の記錄- 關東編』, 柏書房, 2002, 301~302쪽

35)   平井榮一, 『佐渡鑛山史 稿本』, 1950, 8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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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임금을모집인이관리하고있었다는의미가되기도한다.36)

4. 맺음말 – 완전한 역사를 공유하기 위한 길

2021년12월28일,한국정부는외교부대변인성명서와주한일본대사관공보문화원장초치를통해항

의하고‘즉각철회’를촉구했다.시민사회와학계에서도일본에대한비판의목소리를높이고있다.

그렇다면왜한국사회는사도광산세계유산등재신청에문제를제기하는가.바로사도광산의세계유산

등재신청의내용과의도가세계시민이공유해야할가치와방향성을훼손하는방향이기때문이다.세계유

산(문화유산,자연유산)은인류전체가보존하고보호해야하는소중한가치를지닌자산이다.역사의일면

만을편향되게보여주려는사도광산세계유산등재신청은세계유산의성격과지향점을존중하고있다고

평가하기어렵다.

36)   단체생명보험으로 추정. 김종원은 이 외에도 여러 개의 통장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림 27> 김종원의 직업능력신고수첩 내지

<그림 29> 김종원의 직업능력신고수첩 표지(2019.6.26.촬영)

<그림 28> 보험료영수장 표지(2019.6.26. 촬영)

<그림 30> 보험료영수장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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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1467년부터1989년까지운영한사도광산은번쩍이는화려한금의역사만간직하고있지않다.2~3년을

채우지못하고목숨을잃었던일본중세시대광부들의사연.40대에진폐후유증으로세상을떠난이들의

아픔이다.그리고조선인강제동원이라는사실(事實)이다.이러한역사가바로반드시세계시민이공유해야

할완전한역사(FullHistory)이다.

이를위해한국사회가할수있는역할은무엇이있을까.

첫째,사실의무게를느끼기위한노력이필요하다.사실의무게를느끼는것은문제해결의출발점이다.

사실의무게는피해자성의첫단계이기때문이다.사실의무게를느끼고,피해자에게공감하고,재발방지

를하는노력.바로피해자성을지키는길이다.피해자성을공유하고실천하는길은인간의존엄성을지키

는길이기도하다.이를위해서는자료발굴(문헌,유족을대상으로한구술)과연구가필요하다.광산이라는

직종이갖는특성,진폐증실태등다양한분야의학제간연구도필요하다.

둘째,현재중단한한국정부의진상조사기능을시급히회복해야한다.사실의무게를느끼기위한노력

은연구자개인의성실함으로이루어져야한다.그러나개인적으로해결할수없는부분이적지않다.이

발표문에서소개한148명의위원회피해기록은위원회라는한국정부의진상조사기관이존재했기에가능

했던자료이다.2015년위원회해산이후2019년발표자는사도광산에대한자료를추가발굴했으나이

자료를놓고정부가피해조사를하지는않았다.제한된위원회피해신고기간으로인해피해신고를하지

못한피해자는적지않을것으로보인다.피해자148명은<표1>에서정리한총동원인원중일부일뿐이

다.현재중단한한국정부의진상조사기능을회복해피해신고업무를재개하고,사도광산의피해가낳은

후유증을조사해야한다.현재진상조사기능을회복하기위한법안은국회상임위행정자치위원회에계

류중이다.

셋째,대응전략의수립이다.최고의대응전략은세계유산위원회회원국을비롯한세계시민들이사도광

산이라는현장이가지고있는역사성을정확히인식할수있도록객관적인정보를제공하는일이다.그점

에서사실의무게를통한사실성의축적은대응전략을수립하는데토대작업이다.또한독일의람멜스베르

크광산등유사한세계유산과비교하는전략도필요하다.이과정은정부의유관기관(외교부,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동북아역사재단,유네스코한국위원회등)과학계의긴밀한연계를통해이루어져야한다.

넷째,세계문화유산등재과정에서일본측이보이는한계를넘어설수있는선례(善例)를제시하는방법

이다.세계문화유산등재과정에서일본측이보이는한계는가해국의모습이기도하다.역사의가해국은

스스로화해의길을걸어가기도어렵다.그길을이끌어가는것은식민지경험을가진피해국인한국사회

가할수있다.세계문화유산도마찬가지라고생각한다.국내에는8천개가넘는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이

남아있다.37)이가운데대표적인유적으로는인천부평의인천육군조병창이있다.인천육군조병창은일본

37)   정혜경, 『우리 지역의 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 활용 - 방안과 사례』, 도서출판 선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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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자료를 통해 본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식민지유일의일본육군소속의무기공장이었고,평양에소속제조소를운영했다.공출이라는명목으로조

선의민중들에게강탈한놋그릇과숟가락은인천육군조병창주물공장에서녹여무기를만들었고,이무기

는중국침략전쟁에사용했다.이제한국사회는이러한현장을반전평화를위한역사교육의현장으로활

용해야한다.부평의인천육군조병창유적을세계문화유산으로등재해바람직한좋은사례로일본을선도

할필요가있다.

다섯째,강제동원피해는남측출신자의문제만이아니다.강제동원피해자의30%는북한에본적을둔이

들이다.‘조선총독부지정연령자연명부’에서도함남갑산출신을찾을수있다.남북공동조사와연대가필

수적이다.38)

38)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남북한 연대 방안에 대해서는 정혜경, 「일제강제동원 진상규명, 남북한의 공동 과제다」(P’s Letter 53호, 2018년 4월. 

https://cafe.naver.com/gangje#)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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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 참고문헌 ]

內務省 警保局, 『特高月報』1940년 3월분, 4월분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1940)(朴慶植, 『朝鮮問題資料叢書』2권, 三一書房, 1981 수록)

「사도광업소반도노무관리에 대하여」(1943.6)(長澤秀, 『戰時下 朝鮮人中國人聯合軍捕虜 强制連行資料集 – 石炭統

制會極

祕文書』2권, 綠陰書房, 1992. 수록)

平井榮一, 『佐渡鑛山史 稿本』, 1950(익명의 연구자 제보를 통해 일제피해자지원재단이 입수한 신규 자료) 

三菱鑛業セメント株式會社總務部社史編纂室 編, 『三菱鑛業社史』, 1976

地方史硏究協議會 編, 『佐渡 - 島社會の形成と文化』, 雄山閣, 1977

姜徹, 『在日朝鮮人史年表』, 雄山閣, 1983

相川町史編纂委員會, 『佐渡相川の歷史 - 通史編, 近現代』, 1995

㈜TEM硏究所, 『佐島金山』, ㈜GOLDEN佐島, 2001

朝鮮人强制連行眞相調査團, 『朝鮮人强制連行の記錄- 關東編』, 柏書房, 2002

平和教育研究委員会 編, 『新潟縣における韓国·朝鮮人の足跡をたどる』, 2010

정혜경, 『우리 지역의 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 활용 - 방안과 사례』, 도서출판 선인, 2017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일본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 미쓰비시광업(주) 사도광산을 중심으로

(책임연구원 : 정혜경)』, 2019 

임지현, 『기억전쟁』, 휴머니스트, 2019

정혜경・허광무, 『탐욕의 땅, 미쓰비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 도서출판 선인, 2021

張明秀, 「

新潟県在日朝鮮人関係年表」, 『新潟近代史研究』3, 1982

広瀬貞三, 「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者(1939~1945)」, 『新潟国際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人文科学

編]3, 2000

萩愼一郞, 「鑛山」, 『新體系 日本史2 – 産業技術史』, 山川出版社, 2001

정혜경, 「일제말기 조선인노무자 공탁금 자료, 세 가지」, 『강제동원을 말한다 - 일제강점기 조선인 피징용 노무자 미

수금 문제』, 도서출판 선인, 2015

○○○○, 「

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者+新史料」, 强制動員ZOOM講座 발표문, 2021.10.23.

https://cafe.naver.com/gang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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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새로운 자료 소개: 平井榮一, 

佐渡鑛山史 稿本

정혜경

■ 

자료의 생산 배경

‘平井榮一,『佐渡鑛山史稿本』1)’은사도시아이카와(相川)향토박물관소장자료이다.표지에‘昭和25년’

이라기재되어있으므로1950년에완성한것으로보인다.완성한원고는아니고작성중인원고로여러

군데에서추기(追記)한흔적이있다.

2022년1월14일일제피해자지원재단이입수(익명의일본측연구자제보로재단이입수,이하자료

제보자)했다.목차에따르면,천쪽에달하는방대한분량인데,일제피해자지원재단이입수한자료는표

지와목차6쪽,내용6쪽등극히일부이다.

자료의생산배경에대해서는『사도금은산조사보고서』전6권(2010~2016)의해제(小風秀雅,余湖明

彦,「해제-사도광산사의내력과성격」)에서밝히고있다.(※자료제보자제공)

이자료는현재사도시아이카와(相川)향토박물관과미쓰비시사료관이소장하고있다.두소장처자료

는동일한복사본이다.미쓰비시사료관소장본은㈜골든사도소장자료로보인다

이자료는2000년대에니가타(新潟)현립도서관에서도소장하고있었는데,자료기탁자인((주)골든사도)

의의향에따라비공개가되었다.일제피해자지원재단자료제보자는이자료를2015년8월니가타현교

육청문화행정과세계유산기록추진실에서확보했다고한다.

니가타현교육청문화행정과세계유산기록추진실에따르면,이자료에실린내용은전체『사도금은산

조사보고서』전6권(2010~2016)에게재했다.

이자료는1949년당시사도광산의소유권자인다이헤이(大平)광업2)사장이었던하니미치유키(羽仁

路之)가히라이에이이치(平井榮一)에게원고집필을의뢰한데서탄생했다.그러나『佐渡鑛史』는출간하

1)   익명의 자료 제보자가 붙인 자료명으로 보인다.

2)    자료에 따라 다이헤이(大平)와 타이헤이(太平)로 혼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이헤이를 사용하지만, 1949년 작성한 공탁금 현황표에서는 타이헤이로 

사용했다. 미쓰비시광업은 1950년에 미쓰비시광업과 다이헤이(大平)광업으로 분리되었다가 다이헤이광업은 1952년에 미쓰비시금속광업으로 회사명
을 변경한 후 1973년에 다시 미쓰비시금속으로 변경했다. 미쓰비시광업은 1973년에 미쓰비시광업시멘트로 사명을 변경했다. 두 회사는 1990년에 미
쓰비시머터리얼로 통합되었다.

* 민감정보 포함 페이지

삭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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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못하고초고의상태로남았다.

*하니미치유키(羽仁路之.1891~1980):야마구치(山口)현출생.1931년도쿄제국대학경제학부졸

업.미쓰비시합자광산부입사.1946년

三菱鉱業 取締役을거쳐1947년사장에취임.1950년제2회사

인다이헤이광업을창립해사장을역임.1973년미쓰비시금속광업으로개칭한후전국광산회장과일본

광업협회장등역임

*히라이에이이치(平井榮一.1895~1956):사도아이카와에서출생.다이쇼초기부터사도광산에근

무해사도광산채광과장(기사)를마지막으로퇴직.퇴직후相川町立사도박물관초대관장,相川町교육위

원장,미쓰비시금속광업참사(參事)를역임

겉표지에는‘平井榮一稿佐渡鑛山史(一)昭和二十五年’과‘大平鑛業(舊三菱鑛業)(株)佐渡鑛業所’라고기

재되어있고,하단에‘홋카이학원(北海學園)대학의오쿠마요시오(

大隈四千男)에게기증(1989.9.4.)’했다

는메모가있다.

속표지에는‘麓三郞소장자료를빌려서복사’했다는내용과‘제1회~제12회는누락되어있는데,에도

시대의내용으로생각된다’고기재했다.속표지작성일자는‘소화51년1월19일’즉1976년1월19일

이다.속표지좌측에목차의일부가보이는점을볼때,목차의공란에작성한것으로보인다.

겉표지의메모작성자와속표지작성자는알수없다.필체를볼때동일한사람은아닌것으로보인다.

이를통해1950년에히라이에이이치가작성한자료를1976년1월19일에후모토사부로에게빌려서

복사를했고,다시이자료를1989년9월4일에오쿠마요시오에게기증했음을알수있다.후모토사부

로에게자료를빌린사람(속표지)이나오쿠마요시오에게기증한사람(겉표지)에대해서도알수없다.

*자료제보자는,속표지에‘후모토소장자료’라고기재한것은『佐渡鑛山史稿本』의에도시대부분

<그림 1> 겉표지

<그림 2> 속표지

부록 - 새로운 자료 소개: 平井榮一, 『佐渡鑛山史 稿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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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제1회~제12회)을후모토가『佐渡金銀山史話』를집필할당시에사용했기때문으로파악했다.

또한후모토는『佐渡金銀山史話』에히라이에이이치가작성한보론「구막부시대의광산기술」과「사

도의금은산출량에대하여」를게재했다.

*후모토사부로(

蔍三郞. 1893

〜?)구제도쿄고등상업학교졸업.구제도쿄고등상업학교전문부졸

업.1927년미쓰비시합자회사입사.미쓰비시광업해외부장,인사부장,총무부장,감사역을역임(1953

년5월).『佐渡金銀山史話』(미쓰비시금속광업,1956)과『三菱飯塚炭鑛史』(미쓰비시광업,1961)등다수

의저작과번역서등을남김.1976년출간한『三菱鑛業社史』편찬에촉탁으로참가.

후모토는미쓰비시광업의전체상을쓸수있는사원.히라이가『佐渡鑛山史稿本』를집필할당시후모

토가작성한자료를근거로했다고알려져있음.『佐渡金銀山史話』에따르면“히라이씨의원고가완성되

었는데,히라이씨는오직기술적인입장에서집필했으므로하니사장이나(후모토)에게일반적으로읽을

만한것이라도알맞은것을써서보여주면어떨까하고종용했다”(※자료제보자)

■ 

자료의 주요 내용

©

목차는다음과같다.

일제피해자지원재단이입수한자료는표지와목차6쪽,내용6쪽이다.표지와목차를제외하면,내용

은419쪽・420쪽・844쪽・846쪽・847쪽・848쪽이다.

<그림 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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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새로운 자료 소개: 平井榮一, 『佐渡鑛山史 稿本』

한정된내용이기는하지만특기할만한내용은두가지로보인다.다음의두가지는기존의자료에서

언급하지않았던내용이다.

첫째.사도광산역사에서의미를부여하는시기는에도시기가아니라‘일본근대시기’라는점이다.니

가타현은사도광산을세계문화유산으로등재신청을하면서사도광산의대상시기를센고쿠(戰國)시대

(1467~1590년)말부터에도(江戶)시대(1603~1867년)로한정하고,에도시기의제련기술등에의미를

부여했다.그러나이자료에서는‘사도광산의근대사’에주목했다.“부유선광장을신설하는등획기적

인개혁을실현해여러곤란을극복하고1940년에생산신기록을달성”해1940년에금1,537.9톤,은

24,494톤을생산했다고강조했다.자료에서‘획기적인개혁’이라언급한부유선광장은1938년에설치

한시설이다.

둘째, 1944~1945년 조선인 동원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이다. 히라이는 이

1944~1945년동원규모의근거를밝히지않았으나후모토사부로가작성한내부자료를근거로작성한

것으로보인다.(※자료제보자)

히라이는1944~1945년에조선인이514명증가해압도적노동자였다고기술했다.514명이총동원

인원(누적)인지,현재동원한인원인지는알수없다.

-총동원인원(누적)의경우:1,005+514=1,519명

-현재동원인원의경우:584+514=1,168명

특히직종별인원현황에서일본인과조선인을비교하며갱내노동에서조선인의비율을강조했다.

846쪽에서언급한직종별인원현황은1943년6월7일,미쓰비시광업(주)사도광산측이감독기관인

<그림 6> 844쪽 내용

<그림 7> 846쪽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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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도쿄광산감독국과대일본산업보국회,도쿄지방광산부회에제출한보고

서(문서번호855호)「사도광업소반도노무관리에대하여(佐渡鑛業所半

島勞務管理ニ就テ)」를근거로사용한것으로보인다.여기서강조한직

종별인원현황은848쪽에서다시찾을수있다.

848쪽은일본패전후사도광산의상황을기술한부분인데,여기에

서‘조선인노동자가거의전부갱내관계작업에종사’했음을명시했다.

히라이는특히처음기술한문장에누락한내용을추가로기재해“착암

작업과같이상당한숙련자가있었는데,(*조선인이)일제히귀국함에

따라갱내작업은큰타격을입고출광은급속히감소했으므로선광작

업도불충분해져서노무배치의균형이현저히떨어지면서생산을저해

해극도의경영난에빠졌다”고기술했다.

그외,기존의자료를답습하는과정에서조선인의실태를제대로기

술하지않았던부분도볼수있다.그림7의앞부분에서언급한내용에

따르면,조선인은3개월이상근무할경우에는‘단체생명보험에가입시

키고재적중보험료는모두회사가부담하며불행한일을닥치면보험

금3백엔을주고재해에대한부조,퇴직의경우급여관계등에내선구

별이없었다’고기술했다.이내용은1943년6월7일,사도광산측이

감독기관인도쿄광산감독국과대일본산업보국회,도쿄지방광산부회에

제출한보고서(문서번호855호)「사도광업소반도노무관리에대하여(佐渡鑛業所半島勞務管理ニ就テ)」

내용과동일하다.

그러나1943년의보고서는감독기관의보고용으로서의미가있으나당시상황을정확히담은자료라

볼수없다.두번이나큰부상을입은임태호는어떤부조료도받을수없었다.히라이는‘내선구별이

없었다’고기술했으나임태호는열흘간허리를들수없을정도의부상을입었으나현지에있는사도광

산소속병원에갈수없었다.

■ 

향후 과제

이자료의가장큰한계는일반적인기업사에서보이는한계인데,기업의입장을검증없이일방적으로

정리했다는점이다.또한근거를밝히지않다는점이다.작성자(히라이에이이치)와작성연도(1950년)는

알수있으나히라이가사용한사료의근거를파악할수없다.특히1944~1945년간조선인동원규모를

밝힌유일한자료이지만통계의근거는알수없다.

<그림 8> 848쪽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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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새로운 자료 소개: 平井榮一, 『佐渡鑛山史 稿本』

통계의근거를파악하는것은향후과제의하나이다.자료제보자는히라이가원고를작성하는과정

에서사용한사료를미쓰비시경제연구소부속미쓰비시사료관(도쿄소재.http://www.meri.or.jp/

shiryo/mer300j.htm)이나게이오대학미타(三田)미디어센터(https://www.lib.keio.ac.jp/mita/),규

슈대학부속도서관기록자료관(https://www.lib.kyushu-u.ac.jp/ja/libraries/manuscript산업경제

자료부분소장자료.구석탄자료센터소장자료)에서발굴해야한다고제언했다.그러나미쓰비시사료관

은자료공개여부가불명하고,미타(三田)미디어센터도주로단행본중심이다.규슈대학부속도서관기

록자료관은미쓰비시관련은하시마탄광이나지쿠호(筑豊)지역탄광자료가있을뿐사도광산과관련한

자료는소장하고있다고보기어렵다.또한사도광산의세계문화유산등재문제가정치적문제로비화한

상황에서일본에서자료수집은쉽지않을것으로보인다.

일제피해자지원재단이입수한자료가『佐渡鑛山史稿本』의일부에불과하다는점도두번째과제이다.

물론천쪽에달하는내용가운데조선인과관련한내용(제22회자료)은일부에지나지않는다.그가운

데에서도재단이입수한조선인관련내용은제22회자료의일부이다.맥락을이해하기위해서나자료의

형태적가치를위해서도『佐渡鑛山史稿本』의전체자료를입수할필요가있다.

세번째는국내에소장가능성이있는자료를발굴하는일이다.자료제보자가제보한또다른자료에

는경성제국대학도서관소장자료가있다.池上重康・砂本文彦,「

京城高等工業学校鉱山学科・京城鉱山専

門学校採鉱学科実習報告書目録」(『エネルギー史研究ー石炭を中心に』25호,2010년3월)에따르면,경

성고등공업학교(서울대공대의전신)학생들은반드시광산에서현지학습을한후학교에보고서를제출

하도록했다.1941년도보고서는사도광산이대상이었다.주로지질이나광상(鑛床),제련기술등이조사

대상이지만광부에대한내용도포함되어있을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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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학술 세미나

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

Session 01. 주제 발표

02.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강동진(경성대학교도시공학과교수,ICOMOS한국위원회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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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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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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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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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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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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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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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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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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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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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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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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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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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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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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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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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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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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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1. 주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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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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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2. 지정 토론

2022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학술 세미나

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

Session 02. 지정 토론

01.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허광무(한일민족문제학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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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01.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허광무(한일민족문제학회 회장)

일본은지난2015년메이지근대산업시설을세계유산으로등재시키는과정에서우리와역사를같이하고

있는부분에대해온전한역사를전달하지않아우리국민의공분을산적이있습니다.그당시에한국측대응

팀에서정혜경선생님은중요한문제제기와사실규명등에대해많은공헌을한것으로알고있습니다.그런

지난경험을바탕으로선생님은이번사도광산과같은사태를우려하여현장답사와관련자료수집,피해자

조사등진실규명에힘써오셨습니다.선생님의선견적인행보에감탄과경의를표하면서간단하게소감과질

문을해볼까합니다.

1.미쓰비시는지난2015년메이지근대산업혁명관련산업유산군의하나로미쓰비시나가사키조선소와

군함도를포함한미쓰비시다카시마탄광을세계유산에등재한바있습니다.이번에사도광산이유네스코세

계유산으로신청에들어간다면두번째세계유산에이름을올리게됩니다.문제는이곳이모두아시아태평양

전쟁당시일본에의한조선인강제동원이있었던곳으로우리에게있어서잊을수없는아픈기억의현장이

라는점입니다.

미쓰비시는잘아시는바와같이,근대일본을대표하는3대재벌중하나였고일본전역은물론한반도에서

도사업을확장하고있었습니다.아시아태평양전쟁시기에일본과한반도에산재한미쓰비시계열회사에조

선인을노무자로동원한것은말할나위없습니다.가령18개의탄광과28개의광산외조선,제강,기계등

중공업분야를더하면그수가한반도110개소,일본지역140개소,기타사할린·중국·만주등31개소,총

281개소에이릅니다.일본3대재벌중최고입니다.(국무총리소속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

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2016,『위원회활동결과보고서』)

이렇다보니향후세계유산과관련하여군함도나사도광산에머물지않고,미쓰비시계열의제3,제4의세계

유산후보지가등장하지말라는법이없습니다.

이에대처하기위해우리에게필요한게있다면무엇인지,고민하지않을수없습니다.정혜경선생님은발

제문에서다섯가지를제시해주고있습니다.모두합당한의견이라고생각하며토론자의생각과같은부분도

있기에깊이공감하며읽었습니다.선생님께서이중가장시급하다고할까,방점을두는것은어떤것인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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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2. 지정 토론

생님의정부기관에서의활동이나연구를통해절실하게느꼈던점을말씀해주셨으면합니다.

2.강제동원관련자료와관련하여한말씀드릴까생각합니다.보통일제시기강제동원관련자료,기록물

이라고하면일제패망시기의자료소각,그리고한반도6.25전쟁의전란속에행해진소각과망실,분실등이

겹쳐찾아보기어렵다는생각을하게됩니다.더욱이피해사실을입증할만한기록물은가해기업이나일본정

부가생산,소장하고있다보니접근이어려워엎친데덮친격으로연구환경을어렵게한다고생각하기쉽습

니다.

그런데일제시기인력동원은매우치밀하게,계획적이며정책적으로수행한것이기에관련법령이잘정비

돼있었고,그법령에따라노무관리,인력양성이나배치등을통제하고있었습니다.그과정에서매우많은명

부나자료가생산,비치되고있었으므로동일명부를수없이많은기관에서소장하고있었습니다.조심스럽

고치밀하게들여다보면우리는많은자료에접할수가있는것인데요,오늘주제인사도광산과관련해서도

굳이미쓰비시가소장하는자료가아니더라도다른방면,가령연료배급명부라던가조선총독부명부,공탁

금관련자료라던가하는문서에서도확인할수가있는것입니다.강제동원피해당사자가직접소장한자료

도있습니다.선생님은명부나회사측기록물과피해당사자들의면담등을수집하여분석한경험을바탕으로

아무리사소한것이라도놓치지않고추적하여사도광산의진실에도접근했는데요,혹시이과정에서그간의

연구에서는알려지지않은사실을추가적으로규명했다고한다면어떤것들이있는지다시한번설명해주시

면감사하겠습니다.

3.끝으로,우리는지난근대시기역사유적에대해어떻게해왔으며앞으로어떻게해야할지등에대한자

기성찰도필요한시기가아닌가생각합니다.조선인강제동원과관련된유적들이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등

재되는사태를계기로끊임없이우리를돌아보는기회로삼아야하지않을까생각합니다.

우리주위에는일제의한반도침탈과정에서만들어진시설들이상당이많이있습니다.지역경제의활성화

와그에따른개발로많은시설이나구조물들이사라지고있는것이현실입니다만,엄연히우리근대사를보

여주는역사유적입니다.일제의잔재라며철거해야한다는목소리도있습니다.그런데그렇기때문에보존할

만한가치가있는것입니다.그일제에의한통치를여실히보여주는역사물이기때문입니다.우리가자랑하

고싶은것만남기고불편한것들은숨기거나제거하면일본정부가하는것과무엇이다릅니까?우리의역사

를온전하게보존하여전달하지않는것도역사왜곡입니다.

선생님은오랫동안한반도에산재해있는전쟁유적에대해서도관심과조사가있었던걸로알고있습니다.

문화재청의실태조사에도참여한적이있는것으로알고있습니다만,특히전쟁유적과관련하여선생님이알

고있는우리의현주소는어떠한지,문제점은무엇이며향후우리는무엇을해야할지,우리의보존실태와활

용에대해느끼신점,문제점등을설명해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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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실태

2022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학술 세미나

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

Session 02. 지정 토론

02. 
강동진,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

조건(동북아역사재단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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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sion 02. 지정 토론

02. 강동진,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에 관한 토론

조건(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강동진선생님의‘근대기세계유산’에관한발표잘들었습니다.세계유산전체를조감하면서도핵심적인얘

기를잘정리해주셔서많은공부가됐습니다.무엇보다수많은사례들을조목조목열거하고이를‘갈등과극

복’이라는테마로풀어주신부분(「근대기세계유산의유형은어떠한가?」)이인상깊었습니다.감사드립니다.

기본적으로여러사례들을잘설명해주신부분에대해서특별히추가할것은없고,다만선생님께서언급하

신용어와쟁점을중심으로몇가지만질문드릴까합니다.

첫째,세계유산의보편성에관한부분입니다.주지하듯보편적이라는것은두루통용되는,전반적으로적용

되고관계되는것을말합니다.그런데선생님께서세계유산유형들을설명하면서“보편적희소성이강조되는

유산등재의경향확장”이라는표현을쓰셨습니다.희소한것,또는특수한것이꼭보편적이지말라는법은

없습니다만얼핏보편과특수,희소는잘어울리지않는가치로보이는데요.이렇듯희소하면서보편적인유

산의등재경향이늘어난다는것에대해서좀더설명해주십시오.달리말하면희소하고특수하지만이것이

인류보편의가치가있는것이라는점을어떻게제시하고또받아들여지고있는지요.

둘째,세계유산위원회가가장중요한기준으로삼고있는“탁월하고보편적인가치(outstandinguniversal

value)”의해석을둘러싸고많은논의가있는것같습니다.탁월하기만해서는안되고,탁월하면서도보편적

인성질을갖는유산이어야한다는것일텐데요.결국사도광산이세계유산으로등재되면안된다는우리의

주장의핵심에는사도광산이탁월성과보편성두측면에서모두적합하지않다는점이들어있어야할것으로

보입니다.오늘모든얘기를해주실수는없겠지만이두지점에서사도광산이갖고있는문제점은무엇이있

을까요.조선인강제동원에관한사실은OUV와어떻게상충되는것인지문의드립니다.

셋째,사도광산과같은유산을‘부정적인유산,불편유산,부의유산’등으로부르고있습니다.앞으로도이

러한유산의세계유산등재시도가일본뿐만아니라여러곳에서이어질텐데요.이들용어가다소부적절하

다는인상이듭니다.용어의뉘앙스로인해그것이갖는가치보다‘부정적’선입견이먼저전달되기도하는것

같습니다.이들용어를좀더포괄적이면서도긍정적인용어로치환할수는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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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강동진, 「근대기의 세계유산: 갈등과 극복의 조건」에 관한 토론

생각해보면이들유산이세계유산으로의가치를갖는이유는그것이단순히‘부정적’이어서라기보다‘정의’

를바로세울수있는효용이있는유산이기때문이아닐까요.선생님께서도이들유산이“부정적인의미를가

졌으나교훈의대상이되는”이라고언급하셨는데요.이러한측면에서‘정의회복유산(Restorationheritage

forjustice)’과같은명칭도고려해봄직합니다.물론성급한시도이고,또사례에따라다르겠지만유네스코

헌장이떠올라서제안해봅니다.

넷째,선생님께서는‘부정적인유산’이“세계유산으로서의탁월한보편적가치는떨어”진다고하셨는데요.

요컨대탁월한보편적가치는떨어지지만후대에대한교육제공의의미가있어서‘부정적인유산’이세계유

산으로등재되고있다고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이대목에대해서는선뜻동의하기힘듭니다.다시한번‘보편가치’라는것이무엇일까생각하게됩

니다.어쩌면인류라는종의위협이되었던,19세와20세기제국주의・식민주의・전체주의등의폐해를반복하

지않을수있는‘유산’이야말로보편적가치가있는것아닐까요.유산의역사적중요성과세계유산의보편

가치는조금구분해서논의할필요도있을것같습니다.

마지막으로강동진선생님과정혜경선생님께문의드립니다.사도광산의쟁점과관련해서일본정부가시

기를한정하거나이를바탕으로유산자체를축소해서등재하려는시도를하고있습니다.이러한시도를우

리언론에서도이른바꼼수라고지적한바있는데요.지난군함도등메이지산업유산등재때세계유산위원회

가‘전체역사’를대상으로해야한다고언급했던만큼이러한꼼수가얼마나효율적일지모르겠습니다.결국

한국정부는아시아태평양전쟁기강제동원사실과그에대한반성이포함되어있어야한다는점을강력히주

장해야할겁니다.여기에당시일본정부가조선인들의동원에직간접적으로개입했다는사실을밝히는것도

주요쟁점이될수있지않을까요.

이미정혜경선생님께서당시식민당국의자료를발굴해서사도광산조선인동원의실태를밝히신바있는

데요.추가적인자료가발굴된여지가있을지,그리고당시일본정부의개입여부가우리정부의주장을보완

하는역할을할수있을지문의드립니다.

선생님께서그동안세계유산관련해서수많은연구를진행하고관련논의에직접참여해오셨기때문에다

소지엽적인것까지모두여쭈었습니다.너무기본적이거나우둔한질문이었더라도널리양해해주십시오.고

견을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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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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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

2022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학술 세미나 자료집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길 42 이마빌딩6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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